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군사력을 사용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하면서 미·중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사태 직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가장 중요한 외교 일정이 이재명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이다. 중국이 이를 미국의 국제법 위반 등 비판 제기의 무대로 삼을 가능성이 큰 가운데 한국 외교가 예상치 못한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초 이번 이 대통령의 방중은 미·중 정상이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만나 훈풍의 흐름을 타는 중에 이뤄질 예정이었다. 중·일 갈등 와중에 이 대통령이 일본보다 중국을 먼저 찾는 외교적 부담을 감수한 건 한·중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만들기에 미·중 간 화해 기류가 형성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4월에는 트럼프의 방중도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중 직전 발생한 베네수엘라발 돌발 변수로 중국이 미·중 간 비교적 온화했던 기류를 깨고 미국에 각을 세울 여지가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의 마두로 축출은 석유 등을 노린 경제적 목적 말고도 중남미 전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중국의 주요 원유 공급국 중 하나이자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에 적극 참여해 온 국가다. 미국이 ‘반미 연대’의 상징적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중남미에서 중국의 전략적 공간을 축소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중국은 3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군사 작전에 대해 "패권적 행위"라며 "국제법을 심각히 위반하고, 베네수엘라의 주권을 침해하며,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고 강력히 규탄했다. 특히 마두로 대통령이 시 주석이 보낸 추샤오치(邱小琪) 중국 외교부 중남미·카리브해 특사를 만난 직후 체포된 데 대해 중국은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을 거란 분석이 나온다. 이는 미국이 중국 대표단의 동선을 개의치 않고 군사 작전을 벌였고, 중국은 이런 상황을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한 정보력의 한계를 노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위원은 “미국은 반미 세력 결집 차단에 나서고, 중국은 내정 불간섭과 주권 존중 프레임을 앞세우며 대립할 것”이라며 “베네수엘라 사태가 장기적 진영화와 대리전 양상으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이 한국에 보다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 공교롭게도 베네수엘라 사태가 이 대통령의 방중과 맞물리면서 한국으로서는 난데없이 동맹인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와 이에 맞서 중국이 '다자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한 중간에 놓인 셈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중국의 마두로 지원을 의심하는 민감한 시점에 한·중 정상이 만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논하는 모습이 자칫 ‘대오 이탈’로 비칠 가능성도 있다”며 “'외교적 줄타기'의 중요성이 최고조에 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번 작전을 두고 국제법적 논란이 거센 것도 정부로서는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국제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로 꼽히는 유엔헌장 2조 4항은 다른 주권 국가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금지한다. 51조에서 국가가 무력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위권 행사를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미국이 주장해온 마약 유입으로 인한 국가 안보 위협은 자위권 발동 사유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또 전쟁 선포도 없이 타국 정상을 체포하고 나라 밖으로 압송한 건 국제법 위반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중국이 국제법 준수, 주권 존중 등 보편적 언어를 앞세워 대미 규탄 전선을 넓히려 할 경우 동조 여부를 두고 한국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사태 이후 한국 정부가 처음 내놓은 공식 입장도 이를 반영한다. 외교부는 4일 발표한 대변인 성명에서 미국의 군사 행동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자제한 채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의사가 존중돼야 한다”, “대화를 통해 상황이 조속히 안정되기를 희망한다” 등 원론적 입장만을 밝혔다. '국제법 준수'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는 미국의 다른 동맹이 원론적 입장을 표하는 중에도 보편적 가치를 언급한 것과는 비교된다.
일본은 이날 오후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 "(일본은) 이전에도 자유,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고 일관되게 국제사회에서 국제법 원칙의 준수를 중시해 왔다"고 밝혔다. 전반적으로 원론적 입장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국제법 원칙의 준수"를 명시한 점이 눈에 띈다.
미국의 정보 동맹국인 호주와 뉴질랜드도 "국제법과 베네수엘라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정권 이양을 계속 지지한다"(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 성명), "모든 당사자가 국제법에 따라 행동하길 기대한다"(윈스턴 피터스 뉴질랜드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며 국제법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한국이 미국에 대한 명시적 비판이나 지지는 피하더라도 국제법과 민주주의 원칙 준수라는 기준은 분명히 제시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중국의 '미국 때리기' 동참 압박에 사전에 선을 긋는 것일 수 있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하다 오히려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중국의 논리에 말려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안은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라는 점에서 국제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측면이 분명하다”며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그렇다고 중국의 문제 제기에 침묵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국제 원칙 준수와 평화적 해결 지지라는 원론적 표현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