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팬 입가 주름, 익숙한 듯 낯선 눈빛의 얼굴이 70년 가까이 모습을 달리하며 스크린에 새겨졌다. 고(故) 안성기(1952~2026)의 작품세계를 추리면 그대로 한국 영화사가 드러난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집계된 출연 영화만 약 180편이다.
다섯살, 아역부터 시작했다. 김기영 감독의 친구였던 아버지의 영화 ‘황혼열차’(1957) 출연이 계기가 됐다. “아버님이 원래 체육인이신데, 서른 전후에 배우를 꿈꿨어요. ‘황혼열차’에 아버지가 잠깐 나오는데, 아역이 필요하대서 저를 데려간 것이었죠.” 그가 지난 2019년 중앙일보에 밝힌 내용이다. 이후 김 감독과 인연을 맺어 ‘10대의 반항’(1959)에서 소매치기 연기를, ‘하녀’(1960)에서 주인공 동식의 아들 연기를 했다. ‘10대의 반항’ 출연은 그에게 한국 최초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안겨주었다.
청소년기의 모습이 스크린에 기록되진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고 이순재 등과 국립극장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 아역 경력이다. 동성고 재학시절 베트남전이 벌어져 베트남에 진출할 생각으로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진학했고, 학군장교 후보생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병사와 아가씨들’(김기 감독·1977)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복귀 후 첫 히트작이었던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은 그와 배창호 감독이 처음으로 함께 한 영화이기도 했다. 당시 배 감독은 조감독이었다. 고속성장의 이면에 공존했던 빈곤과 소외의 모습을 그린 영화에서 안성기는 ‘하류계급’이자 영화를 상징하는 주연 덕배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로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배 감독과의 인연은 더욱 공고해졌다.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철인들’(1983),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황진이’(1986),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꿈’(1990), ‘흑수선’(2001) 등 배 감독 작품에 연이어 참여했다. 특유의 자연스러운 연기로 ‘리얼리즘’ 영화, ‘사회파’ 영화의 질감을 살렸다.
이후로도 시대상이 담긴 영화에 주연으로 나섰다.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에선 도시 빈민이,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에선 아버지의 장기복역으로 고통받는 청년이 됐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에선 베트남전에 참전한 소설가를,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에선 빨치산 지식인을 연기했다.
그는 2019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의식 있고 시대적 고민을 담은 작품”을 부러 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를 조명한 ‘화려한 휴가’(김지훈 감독·2007), 이후 후유증을 다룬 ‘아들의 이름으로’(이정국 감독·2021) 등에 출연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다.
안성기는 ‘평범’과 ‘비범’을 모두 연기하는 배우였다. 부패한 베테랑 형사 조형사(‘투캅스’·1993), 연예인 매니저(‘라디오스타’·2006) 등을 연기하며 박중훈 배우와 ‘콤비’가 됐을 땐 평범한 소시민의 희로애락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이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짙은 주름이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그만큼 평범한 감정의 질곡을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무거운 연기도 자연스럽게 해냈다. ‘영원한 제국’(박종원 감독·1995)에선 조선시대 왕 정조로 변해 위엄을 보여줬다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감독·1999)에선 짧지만 강렬한 대사를 하는 잔혹한 살인자가 됐다. 북파부대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실미도’·2003),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 안 신부(‘사자’·2019)에서 그의 연기는 관객을 압도하는 힘을 보였다.
고인은 2019년부터 혈액암 투병을 했다. 투병 중에도 촬영에 임하며 스크린을 찾았다. ‘탄생’(박흥식 감독·2022), ‘카시오페아’(신연식 감독·2022) 등에서 각각 조선 최초의 사제 청년 김대건을 돕는 역관, 알츠하이머 딸을 돌보는 아빠를 연기했고 ‘한산: 용의 출현’(2022)에선 이순신의 든든한 부관 어영담이 됐다.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으로 묶이는 ‘노량: 죽음의 바다’(2023)에는 특별출연했다. 고인은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 등에서 “연기자로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병세가 악화하며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