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배우 박중훈(60)의 목소리는 침통에 겨운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배 안성기와 함께 한 40년의 세월. 그에게 안성기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스승이자, 친구였다.
'칠수와 만수'(1988),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라디오 스타'(2006) 등 네 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다. 그리고 대종상 남우주연상 공동 수상('투캅스'),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공동 수상('라디오 스타') 등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둘은 명실상부한 '흥행 불패의 파트너'였다.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불법 다운로드 근절 캠페인 등 한국 영화를 살리기 위한 활동에서도 둘은 함께였다. 영화계 행사, 경조사에 늘 함께 다녔기에 "둘은 변 색깔도 똑같을 것 같다"는 우스갯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박중훈 아버지의 부탁대로 안성기는 후배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겼다.
안성기는 병세가 잠시 호전됐던 2023년 당시 인터뷰에서 '최고의 파트너'로 주저 없이 박중훈을 꼽았다. "둘이 만나면 화학 반응처럼 상승 효과가 생긴다"고 했다. 박중훈은 지난해 말 발간한 에세이 『후회하지마』에서 안성기와의 추억을 소개하며, 투병을 안타까워했다. 안성기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이도 박중훈이었다.
그는 "슬프다는 말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며 어렵게 입을 뗐다.
Q :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발병 후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끝나고 가진 회식에서 '선배님이 계셔서 제 인생이 참 좋았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흐뭇한 듯 빙긋이 웃으셨다. 그때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Q : 안성기 선배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나.
"선배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생활의 우선 순위를 연기에 뒀다. 오랫동안 금주하고 운동을 꾸준히 한 것도 연기를 위해서였다. '만다라' 찍을 때 일상에서도 삭발한 채 승복 입고 다닐 정도로 작품 생각만 했다. 겹치기 출연도 안했다. 엄격한 자기 관리,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지만, 늘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를 배려한 인격자였다. 자기 성찰 속에 절제와 배려를 실천하는 삶을 보며 성직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Q : 수도승 같은 삶을 지켜보며 짠한 생각은 안 들었나.
"원래 에너지가 많고, 예민하고 섬세한 분이다. 늘 겸손하고 자제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타고난 인격자는 없다는 걸 느꼈다. 부정적 에너지와 화를 안으로 삭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나. '골프가 안될 때 예민한 것 같다'는 지적에 '골프가 안돼도 기분 상해 하지 말 것, 동반자 신경 쓰이게 하지 말 것'이라고 적은 쪽지를 갖고 다녔던 분이다. 선배에게서 한결 같은 사람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를 선배로 모시고 많은 걸 배웠다는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다."
(안성기가 촬영장에서 박중훈에게 꿈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예쁜 여자가 자기를 유혹했는데 '내가 그러면 안되지'하며 뿌리쳤다는 얘기였다. 박중훈은 '꿈에선 좀 그러지 그러셨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에세이에서 밝힌 내용이다.)
Q : 한국 영화사에선 어떤 존재였나.
"1970~80년대 한국 영화 암흑기 때 한국 영화 명맥을 이어간 대표작이 한 해에 몇 편씩 나왔는데 대부분이 안성기 주연작이었다. 한국 영화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성기 없는 한국 영화는 설명할 수 없다."
Q : 선배와의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는다면.
"'라디오 스타' 찍을 때 영화에도 나왔던 숙소에 묵었는데, 나와 선배, 이준익 감독 모두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각자 방문을 열어 놓은 채 지냈다. 고구마 구워 먹고, 장기도 두고, 작품 얘기도 하면서 3개월 간 대학생 기숙사처럼 지냈다. 쉬는 날 동강에서 낚시도 했는데 그런 기억들이 선명하다."
(박중훈은 '라디오 스타'에 대해 '두 사람의 호흡으로 빚어낸 모든 감정이 다 들어간 완성형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Q : '라디오 스타'에 대한 애착이 큰 것 같다.
"다정다감하고 소탈한 선배와 가장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는 '라디오 스타'의 박민수 매니저다.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영화 속 관계처럼 우린 정말 끈끈했고, 선배는 내게 커다란 우산 같은 존재였다. '투캅스'와 '라디오 스타'는 애착하는 작품이다."
(박중훈은 에세이에서 안성기를 느릿하고 안전한 트럭, 자신을 쌩쌩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로 비유했다. "선배님 추월 안하고 뒤를 잘 따라다녀서 큰 교통사고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Q : 남우주연상 공동 수상, 흥행, '국민 배우' 타이틀 등 함께 이룬 게 많다. 그럼에도 미완으로 남은 꿈이 있나.
"영광의 시간이었다. 선배와 함께 '투캅스' 시리즈를 이어가고 싶었는데, 미완의 꿈으로 남게 됐다. '투캅스' 말고도 나이에 맞는 연륜과 깊이가 있는 연기를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든다."
Q : 다음 생이 있다면 어떤 관계로 만나고 싶나.
"다음 생에도 선배와 같은 배우로 만나 영화를 네 편 더 찍고 싶다. 이번 생에서 함께 찍은 네 편의 영화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에서 다시 찰떡 호흡을 맞추고 싶다."
Q : 안성기 배우의 묘비에 새겨 넣고 싶은 문구는.
"(한참을 고심한 뒤) 그토록 겸허하게 살았던 사람, 그토록 사랑 받았던 배우, 여기에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