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 뜨면 매일 맞닥뜨리는 감정들이 있다. 분노, 두려움, 좌절감, 죄의식, 슬픔이다. 이런 감정은 과도하게 되면 우리 인생을 삼키는 다섯 짐승으로 돌변한다.
이 세상에는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도 그 다섯 야수에 물려 죽는 사람이 훨씬 많을 터이다. 그러한 괴물들 가운데 ‘두려움’과 관련된 콤플렉스가 있다. 바로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다. 이는 어머니 뱃속 시절을 그리워 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퇴행적 증상을 이름이다.
선지자 요나는 원수의 나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 도시의 멸망을 원한 요나는 그 명령을 무시한 채,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탄다.
도망치던 중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머물다가 회개하고서 뭍으로 토해져 마지못해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억지 춘향으로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읍의 왕과 모든 백성이 회개했으니 당시 요나의 표정이 자못 궁금하다.
이후 요나의 행동이 참 가관이다. 요나는 성읍 밖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아 성읍이 파멸될 것을 기다린다. 그때 그늘을 드리워 요나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준 박넝쿨이 큰 벌레에 갉아 먹혀 죽게 된다. 죽은 박넝쿨을 보며 분개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하셨는데, 이 대책 없는 선지자는 퉁명스럽게 불경한 말로 대꾸한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박넝쿨을 위해 어떤 수고조차 하지 않았던 요나가, 박넝쿨이 죽은 데 대해 비통해 하며 아까워하자, 하나님은 이런 말씀으로 요나를 일갈하신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 4:10-11).
‘요나 콤플렉스’는 20세기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가 제안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잠재력과 성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성장을 회피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며 ‘해야 할 일’을 기피하는 심리 현상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부르심과도 같은 엄청난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우선 피하고 싶은 심리가 이에 해당된다. 더군다나 자신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일을 수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경험하게 되는 떨림과 두려움이 낳은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인해 어머니 뱃속과도 같은 곳으로 도망가려 드는 것이다.
이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아집과 편견으로 구축한 자신만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철옹성 같은 의식 속에 갇혀 하나님과 그 말씀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당신은 ‘그분’을 믿는가, 아님 그분에 ‘대한’ 이념만을 추종하고 있는가?” 루터교 목사로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나탄 쇠더블롬(Nathan Soderblom)이 던진 질문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dogma)’를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복기하고 그것에 복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박넝쿨 잎을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십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육축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정하게 대하는 요나의 완악함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안의 ‘박넝쿨’은 타인의 고통이나 공동의 대의보다 자신의 안위나 비루한 이익에만 집착하는 편협함을 상징하는 은유다. 우리가 민족이나 인종, 이념과 관습에 경도되어 신앙의 본질인 ‘사랑’을 외면할 때마다 영적인 ‘요나 콤플렉스’에 걸려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진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