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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퇴직한 다음 날

중앙일보

2026.01.07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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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옵투스자산운용 고문
가수 이현우는 ‘헤어진 다음날’에서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라고 노래했다. 퇴직자가 그러하다. 연말에서 하루 지났는데 세상이 달라진다. 결제받으러 오는 사람도 없고 업무 관련 문자도 뚝 끊긴다. 귀에는 ‘김부장님! 김부장!’ 부르는 소리만 맴돈다. 사람을 만났는데 내밀 명함이 없다.

혹시 업무 관련해 급하게 나를 찾을지 모른다는 헛된 생각도 한다. 대기업에서 평생 재무 일을 담당하다 임원으로 퇴직한 친구가 퇴직 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퇴직하고 나면 재무 관련 일을 물어보러 회사에서 반드시 전화가 올 거라 생각했는데 한 통화도 오지 않았다”고.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김낙수 부장은 자신이 퇴직하면서 영업에 문제가 생겨 자신을 찾아와 다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꿈을 꾼다.

퇴직 이후 삶은 새로운 우주
과거 매몰비용에 집착 말고
빨리 적응할수록 새 길 보여

김지윤 기자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이 조직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여우는 호랑이에게 잡혀먹히기 직전에 자신은 신령한 존재이니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의심나면 따라와 보라고 한다. 호랑이가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걸어가자 동물들이 진짜로 겁에 질려 도망을 치는 게 아닌가.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이야기다. ACT라는 대기업 배경이 사라진 김낙수 부장은 하루아침에 호랑이 등급에서 여우 등급이 되어 버린다. 무리에서 추방된 수사자 신세가 된다.

퇴직 후의 이 낙차(落差)를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을 깨닫기 위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가? 어둠은 빛이 비치면 사라지듯 삶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길을 마련해둔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온갖 불행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마지막으로 그 바닥에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퇴직한 이들에게 주는 그 희망이란, 퇴직 후에 암울하게만 보이던 상황에 새로운 길이 있고 의외로 거기에 빨리 적응한다는 것이다.

‘예스 마담’ 양자경이 주연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는 선택을 할 때마다 새로운 삶의 우주가 펼쳐진다. 멀티버스(multiverse·다중우주)가 전개되는 셈이다. 영화에서는 배우가 된 나, 성공한 사업가가 된 삶 등 생각지도 못한 여러 우주가 나타난다. 이 영화는 코믹하고 정신없이 전개되어 가볍게 보이지만 2023년 아카데미 7관왕을 한 작품이다.

영화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인은 공기업 퇴직을 앞두고 전통 공예를 배우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하면서, 발을 내딛기 두렵지만 일단 내디디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고 했다.

필자는 2022년 코로나가 막바지일 때 퇴직을 하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발을 내디딘 곳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코로나19로 유튜브가 활성화되면서 많은 유튜브에 출연하게 되었다. 마침 베이비부머 퇴직자들이 많아지면서 은퇴자산관리에 대한 콘텐트 수요가 급증했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많은 명함을 받았고 여러 도시를 다녔다. 태어나 처음 방문한 도시도 많다. 마치 또 다른 우주가 나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필자의 오랜 친구는 공무원을 퇴직하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면서 인생 오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아파트 주민, 은행 여직원, 아파트 설비 관련 업자들의 우주에 들어갔다. 점심에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아간다. 일출 사진을 보내왔기에 부지런함을 칭찬했더니 사람이 많아 앞에 키 큰 젊은이에게 찍어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넉살도 좋아졌다.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앞에 새로운 우주들이 기다리고 있다. 과거의 매몰비용(sunk cost)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한 걸음 내딛자. 새로운 문을 열었을 때 세상은, 빛이 비치면서 어둠에 숨겨졌던 사물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 모습이 펼쳐진다.

퇴직은 1에서 0으로 변하는 디지털적 변화다. 많은 것이 있다가 없어진다. 큰 낙차로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애써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나를 과장하여 보호할 필요도 없다. 그 낙차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 것이다.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은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깐요’라는 말로 코미디계를 장악했다. 사실 이 말의 원조 격은 ‘임자, 해봤어? 해보기나 했어?’라는 말을 한 정주영 회장이다. 일단 걸음을 내딛어보자. 인생 오후의 멀티버스가 여러분들에게 파노라마처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경록 옵투스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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