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2년 4월, 인왕산의 무너진 벼랑 돌무더기 사이에서 도자기 하나가 나왔다. 열어 보니 세 사람의 신주(神主)가 들어 있었는데, 성삼문과 그의 외손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성근보집(成謹甫集)』)
서리 엄의룡의 보고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간 관리와 유생들은 ‘성삼문년무술생(成三問年戊戌生)’ 일곱 자가 박힌 신주에 숙연한 심신으로 예를 올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추념(追念)일 뿐이다. 외손 박호와 함께 인왕산 기슭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 1418년생 성삼문은 죽은 지 216년이 흘렀지만 난신(亂臣)의 이름을 떼지 못한, 아직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삼문의 신주는 그가 태어난 홍주(현재의 홍성) 노은동(魯隱洞)의 옛집에 봉안되었다. 한양에서 홍주까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신 발인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옛 충신을 기리는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세조가 성삼문을 일러 “지금은 난신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고 한 말이 사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난신에서 충신으로 갈아타기는 인왕산 신주 사건이 일어나고도 19년이 더 걸렸다. 숙종 17년(1691), 병자년의 참화가 일어난 지 235년 만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멸족 형벌 알면서도 단종 복위 주도
세조조차 “나중에 충신될 것” 예언
“마음이 정치의 근본, 법은 도구 불과”
자식뻘 단종 즉위하자 늘 안위 걱정
아내·딸·제수·며느리 모두 노비 신세
가까스로 신주 발견된 후 복권 논의
사지 찢어 처형한 후 효시 우리 가운데 성삼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충신열사의 이미지에 그 어떤 죽음보다 참혹하게 삶을 마감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단종 복위를 주도한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도륙을 당한 것이다. “백관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성삼문 등을 거열(車裂·사지를 다섯 대의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세조 2년 6월 8일) 아버지 성승(成勝)과 세 동생 성삼고·성삼빙·성삼성 그리고 성맹첨·성맹평·성맹종 등의 다섯 아들이 모조리 한날한시에 참화를 입은 것이다.
혁명이 실패할 경우 멸족의 형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겠으나 무엇이 성삼문을 이러한 길로 안내했는지, 전해오는 기록에는 그의 심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세조와의 싸움에서 성삼문은 완벽하게 졌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라지만 졌던 성삼문이 만고충신으로 되살아났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능한 그에 대한 기록을 모아 보는 수밖에 없다. 거사를 일으키기까지 그의 행적과 생각,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들의 행방을 통해 그의 삶과 죽음이 함축하는 의미를 반추해보려 한다.
성삼문은 홍주의 외가에서 도총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전기 명문가로 일컬어지는데, 증조 성석용은 개국 공신으로 대사헌을 지냈고 조부 성달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냈다. 성달생은 딸이 공녀로 뽑혀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 되면서 황친(皇親)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자주 왕래한 인물이다. 부친 성승 또한 무과 급제로 관직에 진출하여 병마절도사와 의주 목사를 지냈고 성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성삼문은 21세이던 1438년에 생원시에 하위지와 함께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는데, 집현전 학사에 뽑혀 세종의 어문정책에 깊이 관여하였다. 세종은 중국의 명사(名士)가 요동에 유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보내 한어(漢語·중국어)를 배우게 하는데, 특히 성삼문은 요동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역학(譯學) 연구에 몰두했다.
한글 창제 최대 공신 조선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지정학적 특성상 중국어(한자)의 국어 표기가 중요한 학문 영역을 이루던 시대였다. 이에 성삼문을 비롯한 정인지·신숙주 등 세종이 총애하는 8명의 학자는 왕이 직접 뽑았다는 뜻의 친간명유(親揀名儒)라 불리며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해례본 작성에 참여했다. 특히 성삼문은 중국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중국어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외국어 학습의 방법을 개발하는데,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이 그것이다. 그의 역학 연구는 중종조 최세진을 거쳐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성삼문은 충신이기 이전에 우리말 창제와 연구의 최대 공신이었다.
한편 성삼문은 1447년의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는데, 30세에 이르러 학자 관료로서의 탄탄한 길이 열린 셈이다. 성삼문의 역사의식이나 평소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드문 가운데, 그가 제출했던 과거 시험의 답안지도 중요한 정보원이 된다. 세종이 낸 시제(試題)는 팔준도(八駿圖) 즉 태조가 탔던 여덟 마리 준마의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그 대책에서 성삼문은 말한다.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 되고 법은 정치의 도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아니면 온갖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며, 이 마음이 아니면 모든 정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성근보선생집』) 또 말한다. “모진 추위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있고, 격동하는 물굽이 아래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나니, 치란(治亂)이 서로 잇대는 것은 고금이 동일합니다.”(‘팔준도명(八駿圖銘)’) 한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 세계는 끊임없이 교체되며 운동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약관의 나이에 집현전 학사로 참여하며 성군(聖君) 세종의 지도 편달로 몸집이 커진 근보(謹甫) 성삼문은 문과 급제 3년 만에 왕의 죽음을 맞게 된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은 문종이 37세로 보위에 오르자 왕의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직책으로 그 역할이 커졌다. 직집현전(直集賢殿)이라는 당상관으로 집현전의 운영과 학문 연구를 주관하던 성삼문은 국왕 자문과 세자 교육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국가 제도에 집현전의 관리는 20인(人)인데, 10인은 왕을 위한 경연에, 10인은 차기 왕 교육인 서연(書筵)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문종은 보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죽음을 맞게 되고 12세의 어린 임금 단종이 즉위하였다.
왕과 신하의 관계지만 성삼문은 자식뻘인 단종 이홍위(李弘暐·1441~1457)가 늘 염려되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왕은 성삼문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서적 간행을 빌미로 성삼문을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다. 이에 성삼문은 왕에게 상소하여 인사의 부당함을 알리고 철회를 요청한다. 즉 자신은 문장을 짓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배불리 먹고 안락한 삶을 즐기고 있는데, 잠시 수고한 것에 대해 직책까지 올리는 것은 공공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은총에 한갓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만을 알고 시비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안으로는 마음에 부끄럽고, 밖으로는 청의(淸議)를 더럽히는 일이니 공기(公器)를 중하게 하소서.”(단종 1년 4월 24일)
그런 가운데 왕의 숙부 수양대군은 권력에의 야망을 키워가고, 노련한 정치가 정인지와 한확을 혼맥으로 내 편을 만든다. 정인지의 아들을 사위로, 환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은 것이다. 이들은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자리를 꿰차고 불시에 부왕을 잃은 가련한 어린 왕을 들었다 놨다 한다. 가까스로 버티기를 만 3년,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넘기는데 1455년 윤 6월 11일의 일이다.
단종실록에는 직전 5일 동안 연달아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다(霧塞)”라고 기록되었다. 왕위를 넘기던 날 정3품 동부승지 성삼문은 상서사(尙瑞司)에서 옥새를 꺼내 환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의 단종에게 올리게 했다. 이로써 옥새는 단종에게서 세조로 넘어갔다.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으로 세조의 조정에 서 있지만, 불법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좁은 곳에서 역사(力士)의 감시를 받는 상왕(上王) 단종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재의 왕 세조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차기 왕은 현재의 세자가 아닌 상왕이 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이 단초가 되어 단종 복위사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성삼문을 비롯한 성씨 남자 가족들이 몰살을 당한 지 3개월 후 집안 여자들은 사대부 가의 여비(女婢)로 나눠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次山)과 딸 효옥(孝玉)은 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성삼고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 살 된 딸은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고” “성삼성의 아내 명수(命守)는 병조참판 홍달손에게 주고” “성삼빙의 아내 의정(義貞)은 판종부시사 권개에게 주고” “성맹첨의 아내 현비(現非)는 판내시부사 전균에게 주고” “성승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 이흥상에게 주고.”(세조 2년 9월 7일) 이들은 19년이 지난 성종 6년에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김차산은 노속된 집에서 딸과 함께 남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성삼문도 외손 박호도 대 끊겨 성삼문의 신주는 박임경과 혼인한 차녀 성씨에게 맡겨졌다. 한양에서 살던 외손 박증(朴增·1461~1517)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외조의 옛터로 낙향하여 그의 절의 정신을 기리며 평생을 은거하여 사림들의 존숭을 받았다. 과거 급제로 현달한 박호(朴壕·1466~1533)는 형의 뜻에 따라 외조부 성삼문의 제사를 맡았다. 하지만 외손 박호 또한 후손이 끊어져 성삼문은 친손도 외손도 모두 적멸했다. 후세 사람들은 성삼문(1418~1456)을 명나라 충신 방효유(方孝孺)와 나란히 놓았다.
잔인하고 패악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성삼문, 우리가 그를 절실하게 기억해야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