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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순대는 귀한 특별식

중앙일보

2026.01.08 07:28 2026.01.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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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댓국은 곰탕과 달리 뽀얗고 진하다. 돼지머리와 사골을 10시간 이상 푹 끓여 육수를 낸다. 우상조 기자
추운 겨울을 버티는 비결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순댓국처럼 값싸고 즉각적인 효험을 지닌 음식도 드물다. 국물 한 숟갈이면 언 몸이 풀리고, 허기가 사라진다. 순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먹거리지만, 전통 음식으로서는 제대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싸구려 간식’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다.

지난 연말 국내 최초의 ‘순대 명인’이 탄생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99번째로 지정한 ‘대한민국 식품명인’ 육경희(64)씨다. 육씨는 전국에 40여 개 지점을 둔 순대 프랜차이즈 ‘순대실록’ 대표이자, 전 세계의 순대 이야기를 담은 『순대실록(2017)』의 지은이다. 육경희 명인은 “온갖 것을 버무리고 남김없이 알뜰하게 채워 만드는 순대는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명인과 함께 우리네 순대 문화를 돌아봤다.

순대엔 당면? 처음엔 안 그랬다
인천 옛 송현동 순대 골목의 풍경. [사진 한국관광공사]
“구수한 뼈국 냄새와 선지국 냄새가 교양없이 코를 찌르고 다부지게 생긴 순대가 또한 입안의 침을 생키게 한다. 일단 석유상자를 깔고 앉으면 양반 쌍놈이 없는 곳이다. 여자 대학생이 맛있게 순대국을 먹고 있는가 하면 귀부인이 땀을 흘려가면서 선지국을 마시고 있다.”

1950년 월간지 『신천지』에 실린 ‘순대국과 대포술’의 한 대목이다. 70여 년 전 국밥집 풍경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농식품부가 99번째 ‘대한민국식품명인’으로 지정한 육경희 순대 전문가. 우상조 기자
더 먼 시절에도 순대는 있었지만, 요즘 같은 순대의 꼴을 갖춘 건 1960~70년대에 들어서다. 육경희 명인은 “양돈업이 뜨자 돼지 부산물이 시장으로 쏟아졌고, 자연스레 순대 생산이 늘었다”고 돌아봤다. 여기에 값싸고 다루기 쉬운 당면이 속 재료의 주인공이 되자 순대는 서민의 분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당면순대의 대량 보급 이후 전국의 순대는 비슷비슷해졌다. 이전에는 선지에 채소와 찹쌀로 속을 채워 순대 맛이 제각각이었다. 고민 끝에 순댓집은 순댓국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순댓국 육수의 깊이’로 경쟁하게 된 것이다.

순댓국의 국물은 곰탕보다 뽀얗고 묵직하다. 대개 돼지 머리와 사골이 육수의 기본이 되고 식당에 따라 닭 뼈 따위로 맛을 보강한다. 진한 육수를 내려면 10시간 이상은 끓여야 하는데, 기름을 걷어내며 저어주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대학로 ‘순대실록’의 대표 메뉴 ‘순대 스테이크’. 테이블에서 불쇼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우상조 기자
값도 달라졌다. 1960년대 순댓국 한 그릇이 50원이던 시절, 100원이면 소주 한 병 곁들여 “푸짐하고 거나하게” 배를 불릴 수 있었다. 요즘은 순댓국 한 그릇에 1만원을 훌쩍 넘기는 곳이 적지 않다. 그래도 순댓국은 여전히 값싼 한 끼 식사이자 푸짐한 안주고, 속을 풀어주는 최고의 ‘겨울 음식’이다.

순대는 본래 서민 음식이 아니었다. 돼지를 잡는 날에만 허락된 특별식으로, 마을 잔칫상에 오른 귀한 음식이었다. 육경희 명인은 “요즘 유통되는 순대의 90% 이상이 당면순대”라며 “공장화하며 위생과 관리 측면에선 이점이 생겼지만, 순대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각양각색 전국 순대열전
김주원 기자
육경희 명인은 300곳이 넘는 전국의 순댓집을 직접 찾아다녀 『순대실록』을 썼다. 고유한 매력을 품은 지역 순대의 다양성을 지켜내고 싶어서였다. 그가 정리한 지역의 대표 순대를 하나씩 보자.

강원도 속초는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의 고장이다. 함경도 향토 음식으로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 정착촌에서 재현됐다. 아바이순대는 채소와 찹쌀의 비중이 크고, 선지가 적게 들어간다. 순대는 대개 돼지 소창으로 만드는데, 아바이순대는 대창을 피(皮)로 써 유달리 두툼하다.

당면·찹쌀·시금치 등을 오징어에 채워 통으로 찌는 오징어순대도 있다. 속초 중앙시장의 ‘진양횟집’처럼 손수 오징어순대를 만드는 곳도 있지만, 요즘은 식당 대부분이 공장에서 만든 순대를 사서 쓴다.

전주 조점례남문피순대의 순댓국. 백종현 기자
전라도에는 피순대가 있다. 피순대는 선지를 잔뜩 넣어 맛도 빛깔도 진하다. 특유의 냄새 탓에 취향은 갈린다. 막창을 피로 쓰는 식당이 많은데 누린내를 잘 잡는 게 관건이다. 선지도 내장도 신선해야 잡내가 없다.

충청도는 천안에서 뿌리내린 병천순대가 유명하다. 양배추·파·생강·당근 등을 푸짐하게 채워 부드럽고 담백하다. 경기도 용인 태생의 백암순대는 돼지 선지 대신 소 선지를 사용해 색이 연한 편이고 뒷맛이 깔끔하다. 한 점 한 점 먹을 때는 특색이 적어 보이지만, 순댓국으로 먹을 때는 육수가 잘 배어 감칠맛이 살아난다. 제주도식 전통 순대는 ‘수애’라고 하는데, 쌀 대신 메밀가루와 선지를 섞어 만든다.

‘찍어 먹는 장’도 지역색이 뚜렷하다. 수도권과 충청권에서는 ‘소금+후추’ ‘소금+고춧가루’ 조합이 친숙하지만, 경상도 사람은 막장에 순대를 찍어 먹는다. 전라도에서는 초장이 대세를 이루는데, 새콤한 초장이 피순대의 진한 풍미를 산뜻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란다.

대학로 ‘순대실록’의 상차림. 피순대에 콩나물을 넣은 ‘도저장’, 소고기를 넣은 ‘소순대’는 조선 시대의 전통 순대를 복원한 메뉴다. 우상조 기자
육경희 명인은 전통 순대 복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통 음식으로서 순대의 위상을 회복하는 게 목표다. 가게의 대표 메뉴도 1800년대 말 조리서 『시의전서』에 등장하는 ‘도야지슌대’를 재현한 순대다. 기록에 따라 두부와 숙주, 미나리, 무 등을 채워 넣는단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은은히 퍼진다. 피순대에 콩나물을 더한 ‘도저장’, 소고기를 넣은 ‘소순대’도 조선 시대 기록에서 발굴해 복원한 메뉴다.

육경희 명인은 “어떤 재료든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순대의 매력이고 잠재력”이라며 “순대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백종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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