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파 결핵입니다. 결핵균이 임파선 안에 이미 넓게 퍼져 있어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합니다. 즉시 수술을 해야 해요. "
1976년, 스물 일곱 살에 당시 최고의 대기업인 대우에 입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어느 날 극심한 피로감과 목 한 쪽이 부풀어 오르기에 동네 병원에 들렀던 내게 의사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내렸다.
그 시절, 내 월급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군 전역하면서 결혼한 아내와 한 살짜리 어린 아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날 경복중·경복고·서울대에 보낸 부모님, 그리고 어린 동생들까지….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날 오전 10시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4시가 돼서야 끝났다. 병원에선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며 입원을 권했지만 입원비가 없어 당일 퇴원했다.
" 돈도 없었지만, 회사 일이 밀려 자리를 비울 수 없었어요. 특히 대우는 출결 상황이 나쁘면 진급에서 누락됩니다. 저는 회사에 내 모든 걸 걸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근할 순 없었죠. 수술 다음 날 바로 양복 입고 출근했어요. "
몸도 돌보지 않고 일에 매달렸던 나는 회사에서 “아주 기특한 엘리트”라고 금방 인정받았다. 대리 시절부터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의 눈에 들었고, 부장 시절엔 김 전 회장이 친필 사인을 해 내 인사 발령을 따로 낼 정도였다. 난 내심 “언젠간 ㈜대우 사장에 오를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내가 대리였을 때 일이다. 김우중 회장님이 일본과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데, 실무자인 내게 동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일단 참석해서 가만히 들어보니, 일본 쪽에서 회장님 앞이라고 가격을 엄청 세게 부르는 거다. 쉬는 시간을 틈타 넌지시 회장님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봐.” “지금 저들이 회장님 계신 자리라고 경쟁사에 비해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고 있습니다. 회장님 앞이니 경쟁자 수준만큼 깎진 않겠지만, 제가 한번 합리적인 가격으로 맞춰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한번 해봐.”
그날 미팅은 대성공이었다. 나는 일본이 제시한 가격을 엄청나게 낮추면서 동석한 김 회장의 위상은 높여주는 수준에서 계약을 이끌어냈다. 김 회장님은 크게 기뻐하며 그날 참석자들을 모두 최고급 식당으로 불러 공을 치하해 줬다. 회사의 내밀한 일이라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과장·차장·부장 때도 김 회장님의 뇌리에 박힐 만한 성과를 많이 냈다.
하지만 인생은 뜻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다. 목숨 걸고 일하며 임원을 넘어 사장까지 꿈꿨던 ‘엘리트 사원’ 정상곤(76)은 1989년 나이 마흔에 부장 직급을 끝으로 사표를 냈다. 당시 주변에선 하나같이 “회장에게까지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길이 보장된 사람이, 당장 다른 계획도 없으면서 왜 사표를 쓰냐. 제 복을 제 발로 걷어찬 것 아니냐”며 말렸다.
실제로 김 회장님은 내가 사표를 내자 직접 내 아내한테 두 번 전화하셔서 만류했다. 나를 따로 불러서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잡기도 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회장님이 그 정도 말씀하시면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을 거다. 하지만 난 그때 돌아가지 않은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 사람에겐 저마다의 이유가 있잖아요. 그해에 회장님이 친필 사인을 해서 저를 일본 현지법인 책임자로 발령을 냈어요. 제가 일본 오사카 주재원으로 7년 있다 한국 온 지 3년도 안 됐을 때거든요. 다시 일본에 나가면 제 두 아들은 재일교포처럼 살아갈 게 뻔하잖아요. 제 출세보다 아이들 장래가 더 중요하니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
그리고, 참으로 묘한 것이 인생이다. 내가 대우에서 나오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았고 대우는 부도가 나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수많은 중역, 사장단은 회사 채무 변제 책임에 따라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한때 ㈜대우 사장을 꿈꿨던 난, 대우의 몰락을 보며 눈물을 삼켰지만 개인적인 화는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