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이라면 혹시 모를까, ‘태평천국의 난’에 대한 700쪽 넘는 책을 한달음에 읽어 제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고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웠고 역사책들 속에 끼어있는 짧은 기술 이상으로는 크게 관심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마치 ‘왕좌의 게임’을 보는 듯 그 생생한 내란의 혼돈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 중국사 교수인 저자는 이 책이 종합적인 역사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난세에 책임있는 개인들의 경험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의 사건들을 꿰뚫어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탁월한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심리 드라마를 보는 듯한 주인공들의 내면 묘사로 흔히 “각주로만 취급되던 세계사적 사건”을 거대한 역사 서사로 재탄생시켰다.
우리가 아는 태평천국의 난 속 주요 등장인물은 홍수전과 증국번이다. 이 책에도 두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상식과 조금 다르다. 책은 1852년 홍콩에서 홍인간이라는 사람이 스웨덴인 선교사에게 객가(중원에서 남하한 한족 후예) 출신 선지자 얘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홍인간은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인 홍수전의 사촌동생으로 청군에 쫓겨 홍콩까지 오게 됐다.
1년 뒤 난징이 함락되고 서구의 시선도 따라 긴박해진다. 거기에는 ‘뉴욕데일리트리뷴’의 런던 통신원 카를 마르크스도 있었다. 그는 “중국 혁명은 과부하 걸린 산업 시스템의 폭발을 야기하고, 이는 유럽 대륙의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 결국은 틀린 예언을 피력했다. 저자는 그밖에 미국과 유럽 언론들의 논평을 비교함으로써 중국 내전이 이미 “유럽과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 이어지는 실들에 얽혀있었음”을 입증한다.
선교사 보조로 머물던 홍인간은 1856년 난징으로 가서 태평천국에 합류한다. 당시 천왕 홍수전은 황실정원 이화원에 파묻혀 있던 청나라 황제만큼이나, 자신의 화려한 궁궐 안에서 세상과 멀어져 있었다. 2인자 중 하나인 동왕이 난징을 자신의 영토인 양 다스리다 쿠데타로 죽었다. 참수된 머리는 담에 걸렸고 그의 가족과 추종자 6000여명이 학살됐다.
이러한 때에 믿을 수 있는 사촌을 재회한 것은 홍수전에게 신의 계시였다. 그는 홍인간을 주위의 시샘 속에서 간왕에 봉한다. 방패 간(干)자를 쓴, 충직한 군사 참모이자 국가 질서의 수호자라는 의미였다. 홍인간은 실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세계적 개혁안”을 내놓고 태평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중화’와 ‘조공’ 개념을 과거의 유물로 폐기하고, 미국과 영국의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내세운다. 중국도 세계 산업경제에 뛰어들어야 강해질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교통 인프라(물류 이동)와 신문(정보 전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증국번은 6장에 가서야 등장한다. 알다시피 태평천국의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막는 역할이다.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후난성에 내려와 있다 얼떨결에 황제의 명을 받고 반군 진압 민병대의 총사령관이 된 증국번 이야기는 익히 아는 등장인물인지라 그리 새롭지 않다. 다만 증국번이 처음엔 이홍장을 (단련을 위해선지 경계를 해선지 몰라도) 지극히 홀대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다른 유능한 부하들을 물리치고 ‘고시(과거) 출신 후배’인 그를 2인자로 중용했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두 주인공의 대결에 서구가 개입한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중립 표방과는 달리 각각의 이익에 따라 줄타기를 하며 사태를 악화시킨다. 특히 영국은 한쪽에서 청군을 공격할 때 다른 쪽에서는 태평천국군에 포격을 가하는 갈팡질팡 행보를 보인다. 그러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에 개입하는 대신 청나라 정부를 돕는 쪽을 택한다.
결국 시신들로 양쯔강의 물길이 여러 번 바뀌었다던 내전은 끝났다. 그 과정이 내내 긴장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진다. 그러면서 수천만 중국 백성들의 운명이 서구의 자국우선주의, 청나라 학자 관료들의 보신주의, 반란군 지도자들의 혼란스러운 신념에 의해 어떻게 바뀌고 움직였는지 차분하지만 통렬한 시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