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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우이기도 스승이기도 한 그들 [왕겅우 회고록 (36)]

중앙일보

2026.01.10 13:00 2026.01.1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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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직 난징에 계실 때, 내가 영어영문학 과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알고 싶어 하셨다. 내게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시면서 동료 학생들을 궁금해하셨다. 독서를 아주 잘한 급우들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놀라시는 기색 없이 나보다 서양 문학과 문화를 더 잘 이해하는 친구들을 알아보는 것을 칭찬하셨다. 중국어문학과의 첸서즈와 장슝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번역본으로 읽고 몇몇 다른 유럽 작가들의 작품도 잘 안다고 말씀드렸더니 인문학 분야 중국 학생들이 번역본을 통한 독서를 많이 했을 것으로 예상했다고 하셨다.

이제 나는 그 작품들을 원어로 읽는 중국인들과 만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 작가들에 관해 중국어로 토론하면서 열띤 비평을 내놓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나 역시 서양 소설과 시 작품의 번역본을 읽어본 친구들과 중국어로 토론하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이 그 문학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맥락을 잘 파악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영어 능력, 적어도 읽기와 쓰기의 능력이 탁월한 두 친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외국어문학과 급우였고 그중 하나는 기숙사 방우이기도 했다. 거의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 친구들인데, 한 친구는 영어 자체를 표적으로 했고, 또 한 친구는 서양문학에 들어가는 길로 영미문학을 활용했다. 샤주퀘이(夏祖奎)는 23세, 주옌(祝彥)은 21세, 나는 17세였는데, 문학적 관심을 공유하는 사이였고, 두 사람은 나를 키워줄 동생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재미있어하셨다. 두 사람의 형 노릇을 반기면서 그들에게 잘 배우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는데 나중에 떠오른 점이 있다. 나처럼 중국어가 약하고 영어를 문명의 열쇠가 아니라 생활의 도구로 익힌 해외 출신 학생보다 중국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지적 성숙도가 높을 것을 아버지는 내내 알고 계셨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중국 내의 신식 학교에서 공부한 똑똑한 학생들은 문화적 문제의식을 떠올리기 쉬웠을 것이다.

친영파 샤주퀘이는 영국 문학의 장점에 집중하면서 초서에서 디킨스에 이르는 언어의 진화과정을 음미했다. 그는 전쟁 중 4년간 일본군이 점령한 상하이에서 왕징웨이 괴뢰정권 아래 지냈다. 그 경험이 극도의 비-정치적 태도를 만든 것인지, 당시 치열하던 국공내전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영작문은 완벽했고, 발음도 틀리는 일이 없었고, 문법과 구문의 지식도 나보다 훨씬 나았다. 입학시험 영어 과목에서 그가 최고점을 받은 사실을 나중에 들었을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말하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거의 없는 언어를 그렇게까지 통달한 경위를 그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상하이 조계 구역에서는 영어 쓰는 사람이 좀 있었나 짐작할 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어려서부터 공부했다는 고전한문도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들을 강의에서 그가 더 배울 것이 없어서 자기식 공부에 모든 시간을 쓴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어 어휘의 근원을 라틴어와 그리스어, 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 찾는 공부의 중요성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 여러 언어에 그가 얼마나 익숙한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 문법과 구조를 영어와 비교할 만큼 잘 안다는 사실만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진 중 그가 관심을 보인 사람은 토머스 하디 소설 몇 편을 번역한 뤼톈스(吕天石) 교수였다. 하디에 관해 아버지의 문학잡지에서 읽은 적은 있어도 그 작품은 읽은 것이 없었다. 현대 작가 중에는 조지프 콘래드와 D.H. 로렌스에게 더 끌렸었는데, 〈테스〉와 〈캐스터브리지 시장〉의 원서를 만나기 전에 번역판으로 읽기 시작하고 있었다. 샤주퀘이가 뤼 교수의 번역을 놓고 여기는 잘 됐는데 저기는 중국어 선택이 좀 의문스럽다는 둥 비평을 가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신입생이 교수님의 작업을 비평한다는 것부터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그 비평에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샤주퀘이는 선생으로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북경외국어대학의 가장 뛰어난 영어 교수 한 사람이 된 것을 알았을 때도 놀랄 일이 없었다. 1980년 다시 만났을 때는 유엔이 베이징에 세운 동시통역사 훈련과정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의 언어실습실을 찾아가 훈련받고 있던 학생들을 보고 그들이 유능한 전문가로 자라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32년 만에 만났을 때 미소짓는 그의 쾌활한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조금 통통해졌을 뿐. 벗겨지지 않은 머리에 회색 가닥이 조금 생겼었다. 비정치적인 태도는 여전해서 덩샤오핑 개혁 이후 살기가 좋아졌다는 말조차 없었다. 문화혁명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도 말하지 않고 그 주제에 언급을 거부했다.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능력을 다해 봉사하면서도 국가 발전을 내세우는 어떤 공식적 구호나 당 선전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1990년대에 한 번 더 만나고, 은퇴 후 영국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네 집에 살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 수술이 잘못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또 한 친구 주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중앙대학 입학 전에 윈난성 외진 곳에서 교사로 전쟁기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난징에서 멀지 않은 쟝수성의 쟝인(江陰)에 살았는데, 머나먼 윈난에 가게 된 연유는 들은 적이 없다. 자기 삶과 배경에 관해 감추는 것이 많았는데, 윈난의 소학교 교사로 지낼 때 사귄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웠다는 이야기는 했다. 항일전쟁에서 활약한 플라잉타이거스 기지가 있던 쿤밍 부근에 학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미국인이 자기 책도 빌려주고 기지 도서관의 책 대출도 도와주었다고 했다.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작품은 월트 휘트먼의 〈풀잎 Leaves of Grass〉이었다고 했다.

주옌은 문학을 늘 좋아했지만 서양문학을 주로 번역본을 통해 접했다. 그런데 윈난에서는 번역본을 구하기 어려워 영어로 읽기 위해 본격적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어가 부쩍 늘었다. 휘트먼에게 제일 마음이 끌렸다면서 모서리가 해진 책을 보여주며 어느 시를 제일 좋아하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열린 길의 노래 Song of the Open Road”로 기억한다.

그가 영국에서 나온 문학으로 쉽게 관심을 돌린 사실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주옌이 샤주퀘이와 달리 현대 시인들을 더 좋아한 데는 휘트먼의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T.S. 엘리엇과 W.H. 오덴의 작품을 내게 알려주었다. 현대문학에 관한 그의 박식 앞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문학잡지를 보여주는 아버지 아래 자라 영어 학교를 다닌 소년으로서 영어 문학세계를 웬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허술한 것인지 주옌 앞에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엇과 오덴에 관해 그에게 배운 것이 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현대문학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길이 열렸고, 영국문학이 내게 종래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주옌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어느 날 난징 영국문화원에 엘리엇의 〈4부작 Four Quartets〉이 들어왔다며 나를 데려갔을 때 알아봤다. 나는 모르고 있던 몇 해 전에 나온 책인데, 그는 그 책의 도착을 알고 읽으러 간 것이었다. 새 책이고 한 권뿐이라 대출이 안 된다고 하자 앉아서 베끼기 시작했다. 하루에 몇 장밖에 베낄 수 없어서 며칠을 매일 가서 전문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그런 짓 하는 사람을 본 일이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러시아 작가들,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사랑이었다. 러시아어를 읽지 못하면서 중국어 번역본에 만족하지 못해 〈안나 카레니나〉와 〈죄와 벌〉 영어판을 읽었다. 나랑 만날 무렵에는 〈카라마조프 형제들〉 영어판을 읽고 있었다. 그의 독서목록을 보면서 중국 청년들이 최고의 유럽 작품들을 읽어 온 길을 알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이 첫 세대 중국 청년들에게 과학사상과 철학사상을 가르쳐주었다. 20세기 초에는 다음 세대 청년들이 옌푸(嚴復)와 린수(林紓) 등의 번역을 통해 사회과학과 소설을 받아들였다. 다음에는 최신 서양 작품들을 일본어를 거친 중국어 번역본으로 읽은 세대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그리스-로마 고전을 포함하는 유럽 작품 전체로 독서의 지평을 넓혔는데, 영어 번역본이 주된 매체였다. 중일전쟁으로 책의 흐름이 좀 늦춰졌으나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의 종류는 많았다. 물론 책에 접할 수 있는 범위에 제한이 있었지만 중학 졸업자들에게도 서양 작품들을 접할 길이 있었다. 그래도 주옌의 독학 범위는 윈난성 작은 마을에서 청년기를 지낸 사람으로 정말 경이적인 현상이었다.

1980년에 샤주퀘이, 장슝과 함께 주옌을 다시 만났다. 그는 북경외국어대학 독일어학과의 중견 교수가 되어 있었다. 1949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후 독일어로 바꿨고 1951년에 졸업했다. 동유럽언어학부에 남아 가르치다가 독일어학과 과장이 되었다. 문학 교육을 전공으로 했고, 네 권짜리 독일학 표준 대학교재의 편찬 팀을 이끌었다. 문화혁명 때의 일은 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도 그에 관한 말이 없었다. 32년 전 이별 전의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였다.

1948년 11월 말, 내가 말라야로 떠나기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도 생각났다. 밤중이었는데, 작별 인사를 한 뒤 놀라운 말을 했다. 쟝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강 북쪽으로 건너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난징의 최후 공격을 위해 북쪽에 모이기 시작한 적군에게 넘어가겠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를 믿고 한 말이 분명하다. 주옌을 대단히 존경하던 장슝이 후에 가르쳐준 데 따르면 주옌은 고아였고 그 아버지는 중일전쟁 때 공산게릴라 쪽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독일문학 연구자로 비정치적 태도를 지켰으나 교육 당국에서 애국자로 신임받았다.

주옌은 난징의 중앙대학 시절 내 친절한 스승이었고, 함께 지내는 몇 달 동안 나를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자기가 베껴 쓴 〈풀잎〉을 고향으로 떠나던 그날 밤에 내게 선물로 주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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