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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생존자에 "얼른 나와" 잔소리…이들이 매일 신발끈 묶는 까닭 [Health&]

중앙일보

2026.01.1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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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생존자 일상 회복 돕는 크루 활동

치료 후유증·불안에 스스로 고립
2040 ‘암시롱롱런·걸어봄’ 크루
밖으로 다시 나가 달리고 등산
“서로 지탱해줘 함께라는 게 선물”
“이거 잘 묶어야 다닐 때 덜 아프더라고요.”

1. 김모(45)씨가 인근 공원에 나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다. 그는 “운동화를 신기 위한 움직임 자체가 사실 쉽지 않다”며 나오기까지의 망설임을 이겨내는 게 제일 어렵다고 했다. 인성욱 객원기자 2. 지난달, 발로 붕어빵을 그리며 함께 걷고 달렸던 ‘암시롱롱런’ 크루 4인의 모습. [본인 제공]
화창했던 지난 6일 서울 송파구의 한 근린공원. 유방암 경험자 김모(45)씨가 하늘색 운동화 끈을 다시 한번 고쳐 맨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를 직장과 학교로 보내고 나면 녹초가 되는 이른 낮, 아직 몸은 덜 풀렸고 마음도 늘 흔들린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낮에 바깥 공기를 한번 더 마셔보기로 했다. 2021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선(先)항암과 수술을 받은 지 4년 차지만 몸은 여전히 매일 낯설다. 김씨는 “나오려고 마음먹고 준비하는 과정이 솔직히 많이 귀찮다. 그걸 이겨내는 게 되게 어려운 것 같다”며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동네 한 바퀴 뛰고 들어간다”고 했다.



생각 멈추면 일상 버티는 힘 생겨

추운 날에도 땀이 날 때까지 운동을 즐겼던 그는 암 치료 이후 마음처럼 몸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점점 움직이려는 의욕이 사라졌다. 피로감 앞에 스스로 당황할 만큼 쉽게 무너지던 그를 다시 밖으로 이끈 건 암 진단 당시 함께 슬퍼하고 움직여주던 친구들이다. 이들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초긍정 마음가짐으로 ‘암시롱롱런’(암 싫지만 다 괜찮다! 오래 살자) 4인방 크루를 결성했다. 서울아산병원이 지난해 10월, 젊은 암 환자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20~45세의 ‘MY HOPE’ 운동 크루를 모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암을 겪기 전엔 이렇게까지 나약하지 않았는데’란 생각이 들면 우울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알아채는지 벗들이 먼저 ‘나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던 지난해 12월 12일, 붕어빵을 그리며 달리는 ‘붕어빵런’ 3.86㎞도 그렇게 완주했다.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추위를 불사하며 걷고 뛰었던 이날을 김씨는 ‘뜨끈폭신 바삭한 붕어빵’ 같은 감각으로 기억한다. 그는 “무겁고 느린 몸을 일으키기부터가 쉽지 않아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도 있다. 그래도 벗들이 얼른 나오라며 잔소리도 하고 기다려준다. 늘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했다.

함께 운동하지 못하는 날에는 단톡방이 또 다른 출발점이 된다. 누군가 ‘운동했다’고 남기면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나도 나가보자. 공동현관까지라도 나갔다 오자’는 생각에 운동화를 신는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 3㎞, 5㎞를 걷고 달리면 무기력과 귀찮음을 이겨낸 자신이 대견해진다. ‘땀 흘리고 나면 뭐든 해낼 것 같은 신나는 기분도 따라온다’는 김씨는 요즘 30분을 달려 수영장으로 향한다. 도착할 때면 한여름마냥 땀을 뻘뻘 흘린다. 그는 “이 기세로 수영이 다시 재밌어질 때까지 가보려 한다”며 이날 저녁 수영을 다짐했다. 지금의 몸과 다시 신뢰를 쌓아가는 중이다.

전체 인구의 약 5%, 20명 중 1명은 암 생존자다. 치료가 끝나면 곧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몸은 여전히 낯설고, 예전엔 당연하던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다. 피로와 통증, 부종 같은 후유증도 흔하다. 외모 변화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수술과 항암 과정에서 쌓인 심신의 부담은 깊은 우울과 좌절로 이어지기 쉽다.

MY HOPE 크루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희정(유방외과) 서울아산병원 암교육정보센터 책임교수는 “젊은 환자들은 진단 이후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경우가 꽤 있다. 병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위축된다”고 말했다. 홀로 생각에 갇히면 자책이 끊이지 않고, 몸의 작은 변화에도 불안해진다.

그럴 때 조금만 손을 내밀어주는 존재가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회복하며 마음을 다시 바깥으로 연다. 김 교수는 “걷고 달리다 보면 잠시 생각이 멈추는 시간이 온다. 불안을 내려놓고 마음에 숨을 틔우는 그 시간이 치료 후 일상을 버티게 해준다”고 말했다.

1. 한라산 정상에 올라 눈 덮인 백록담을 마주한 임모(40)씨는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2. ‘걸어봄’ 크루 4인은 한라산 등반 도중 항암제 복용 시간에 맞춰 잠시 걸음을 멈췄다. [본인 제공]


위로받던 환자가 먼저 손 내밀어

새해 첫 주말이던 지난 4일 새벽, 임모(40)씨는 아직 어둠이 짙은 한라산 탐방로 입구에 섰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발밑을 한번 살피고, 옆 사람의 걸음을 확인하며 한 발씩 내디뎠다. 누군가 숨이 가빠지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2040 암 경험자로 이뤄진 ‘걸어봄’(걸으며 다시 봄을 맞이한다) 크루의 산행은 늘 이런 방식이었다.

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치료 이후 달라진 호흡과 예전 같지 않은 체력, 그럼에도 다시 걸어보겠다는 마음이 보폭에 담겼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말은 줄었다. 대신 심장이 뛰는 속도와 허벅지에 차오르는 묵직함, 여기까지 와도 괜찮다는 확신이 또렷해졌다. 다시 내 몸을 믿어보는 시간이었다. 임씨는 등반 전날 통화에서 “한라산이 전면 통제라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또 하나의 계절과 산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설렌다”고 했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걸어봄 크루는 지난가을의 끝자락에 설악산 대청봉을 1박2일로 등반했다. 도전은 모두의 인생 첫 러닝대회였던 10㎞ 완주로도 이어졌다. 기록·속도보다 함께 안전하게 다녀온게 선물이었다고 한다.

젊은 환자에게 같은 경험을 한 또래는 부모, 의사보다 친구 같은 존재다. 김 교수는 “엄마가 말해도 안 듣던 아이가 크루 활동을 하며 밖에 나가 웃고 밝아진 걸 보니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며 “처음엔 위로받던 환자들이 새로 진단받은 환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격려하기 시작했다.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고 떠올렸다. 회복의 또 다른 모습을 본 셈이다.

진료실 밖에서 만난 환자들은 그 나이대의 여느 청년들과 다르지 않았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치료 기술은 선진국 수준이나 이후 삶의 회복을 돕는 프로그램은 부족하다. 병원과 사회가 함께 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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