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가 쿼드러플 악셀(4회전 반) 점프를 성공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전 시도 전부터 ‘되겠다’ 싶어 덤덤했죠.”
다음 달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앞둔 스노보드 국가대표 이채운(20·경희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2024년 11월 스위스에서 세계 최초로 성공한 ‘프런트 사이드 트리플 콕 1620’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중에서 뒤로 3바퀴를 도는 동작을 포함해 총 4바퀴 반을 회전하는 이 기술은 올림픽 금메달 3개의 신화 숀 화이트(미국)조차 도달하지 못한 초고난도의 영역이다.
그의 경력은 드라마틱하다. 6살 때 아버지가 사준 장난감 보드로 입문한 그는 스포츠용 이어폰을 꽂고 미국 래퍼 거나(Gunna)와 빅 엘(Big L)의 비트를 들으며 설원을 누비는 ‘힙’한 보더다. 2.5kg의 딱딱한 보드에 몸을 싣고 다섯 차례의 공중 기술을 펼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천재성은 일찌감치 증명됐다. 2023년 국제스키연맹(FIS) 세계선수권 남자 하프파이프 역대 최연소(16세 10개월) 우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2024년 동계청소년올림픽 2관왕, 지난해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3월 왼쪽 무릎 연골판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부침을 겪었다. 지난 4일 캐나다 캘거리 월드컵에서는 13위에 그치기도 했다. 이채운은 “지난 시즌 초반 무릎이 찢어진 상태에서도 참고 탔다. 수술 후 다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 찾아왔고, 통증도 여전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압박감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듯 보였으나 이내 “기량이 떨어진 건 아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기술도 완성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겁 없이 하늘로 솟구치다 부상에 잠시 주춤했던 천재는, 스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자고 끊임없이 주문을 거는 듯했다.
하프파이프는 U자 모양의 슬로프를 가로지르며 점프와 회전을 선보이는 종목이다. 이채운은 아파트 2층 높이인 4.7m까지 날아오른다. 중계 카메라가 속도를 못 따라갈 정도의 고공비행이다. 정작 하늘이 일상인 그는 롤러코스터도 잘 못 타는 고소공포증이 있단다. 이채운은 “사망 사고가 날 만큼 위험한 종목이고 나 역시 머리부터 떨어지는 아찔한 경험을 했지만, 롤러코스터와 스노보드는 다르다”고 말했다. 기계에 몸을 맡기는 공포는 제어할 수 없지만, 스노보드는 자신의 몸으로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기에 무섭지 않다는 논리다.
그는 올림픽 무대에서 깜짝 선보일 필살기를 이미 개발해 뒀다. 이채운은 “스노보드 판을 바꿀 수 있는 상상도 못 할 조합의 기술이다. 한 방을 위해 아직은 비공개”라고 전했다. 허언이 아니다. 주위에선 성공률이 이미 80%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평소 실력만 발휘한다면 올림픽 결선에서 완벽한 착지로 ‘뒤집기 금메달’을 거머쥐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4년 전 베이징올림픽 예선 탈락 후 분한 마음에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승부욕이 강한 청년. 이제 그는 한국 최초의 설상 종목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위업에 도전한다. 경쟁자는 기술의 정교함이 강점인 스코티 제임스(호주)와 압도적 스케일의 히라노 아유무(일본)다.
롤모델이 보더가 아닌 축구선수 손흥민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외모와 말투까지 닮아 ‘스노보드계 손흥민’이라 불리는 그는 손흥민의 ‘찰칵 세리머니’에서 영감을 얻어 두 손으로 승자를 뜻하는 ‘W(Winner)’를 만드는 세리머니도 준비했다. 이채운은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환경이나 오랜 타지 생활도 손 선수와 비슷하다”며 “훗날 ‘스노보드 킹’이 되어 꼭 직접 만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