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연극이다. 잘 짜인 시나리오를 토대로 배우들이 대사를 읊조리는 연극처럼 외교에도 연기가 중요하다. 국제정치의 연극 무대에서 이 시대 주연배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다. 두 사람의 연기에 따라 지구촌엔 언제든지 격랑·지진·쓰나미가 몰아닥칠 수 있다.
트럼프 'FAFO'와 시진핑의 훈계
힘을 앞세운 강대국 행태 엇비슷
자강 역량, 외교적 연기력 키워야
새해 벽두부터 두 주연배우는 각자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연극을 선보였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 그는 지난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전격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마약 범죄는 명분이고, 석유 이권이 배경으로 꼽힌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다목적 포석도 있다. 중남미 좌파 독재자들은 경악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일곱 시간 뒤 탄도미사일 발사로 반응했다. 한국 좌파들은 "신제국주의"라며 흥분했다.
트럼프 2기 들어 신고립주의 경향을 보이던 미국이 신개입주의로 급변침했다. 트럼프의 현란한 연기 변신이다. '돈로주의(Donroe Doctrine)'란 신조어에서 보듯 먼로주의를 변형한 트럼프의 팽창주의적 패권주의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국제법을 함부로 무시하는 '선택적 편의주의'다.
트럼프의 맞춤 연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두로 체포 직후 백악관은 공식 SNS 계정에 비장한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는 트럼프 흑백사진을 게시했다. 사진 밑에 붙은 'No games(더 이상 게임은 없다). FAFO(까불면 죽는다)'란 글귀는 비속어를 동원한 노골적 협박이었다.
이 사진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미국에 도전하는 적대국이거나, 미국 이익에 어긋나는 동맹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진의 배경이 김해공항이다 보니 지난 10월 경주 APEC 당시 김해공항에서 트럼프를 만난 시진핑 주석 보란 듯 올렸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 대통령의 친중 행보를 간접 겨냥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사진 한 장으로 핵폭탄급 반향을 일으켰으니 트럼프야말로 글로벌 연기대상감이다.
시진핑의 연기도 만만찮다. 미·중 패권 경쟁에 이어 터진 중·일 갈등 와중에 한·미·일 진영의 한국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다. 이 대통령이 남북 사이에서 중국의 적극적 중재 역할을 주문했지만, 시 주석은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로 선을 그었다. 대신 북한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중국 발표문엔 비핵화도, 통일 언급도 없었다. 시 주석이 연극 대사를 잊은 것인지, 원래 대본에 없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이 대통령은 한한령(限韓令) 해제, 서해 중간수역 구조물 철거 등 현안 해결에 공을 들였으나 시 주석은 손에 잡히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공동성명도 없었다. 이 대통령은 "한·중 관계 전면 복원이 (이번 방중의) 최대 외교 성과"라고 자평했다. 문재인 정부 때의 굴욕적 혼밥이 없었고, 윤석열 정부 시절의 감정 대립에서 벗어났으니 성과라면 성과다. 시 주석이 선물한 중국산 스마트폰으로 정상 부부 셀카 사진을 찍은 이 대통령의 애드리브 연기만 눈에 띄었다.
시 주석 대사에서 압권은 따로 있었다. 이 대통령을 앞에 두고 "역사의 올바른 편에 굳건히 서서 정확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 장면이다. 미·중 사이와 중·일 사이에서 중국 편에 서라는 이간책이자 압력성 발언이었다. 표현은 점잖았지만, 내용은 훈계여서 외교적 결례란 뒷말이 들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럼프의 '까불면 죽어'라는 표현이나 시 주석의 '올바른 편에 서라'는 말은 본질에서 같다는 점이다. 내 말을 듣고, 내 이익을 존중하고, 딴생각 하지 말고, 내 편에 서라는 강대국의 경고다. 단순히 공자 말씀으로 간주하거나, "착하게 살자"는 의미로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인가. 외교 무대에서 주연배우로 도약하려면 싱가포르 지도자를 배울 만하다. 깊게 생각하고, 말은 줄이고, 행동은 간결하게 하면서 자강 역량과 외교적 연기력을 키우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