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약 17% 수준) 보유국인 베네수엘라에 ‘석유의 저주’가 닥쳐오고 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막대한 석유 수입을 복지에 쏟아부었으나 유가 급락과 함께 초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 국가 경제가 붕괴되면서 ‘석유의 저주’를 겪었다면, 이번엔 베네수엘라 석유를 노리는 강대국의 개입이다.
트럼프, 마두로 충성파 손 잡고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 속도전
에너지패권 강화로 중·러 압박
야권 정권교체 요청엔 소극적
지난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체포해 재판에 회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마두로의 측근인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현 대통령 권한대행)과 타협해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마약 차단과 민주주의 회복은 이번 군사 개입의 명분일 뿐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지난해 자신이 받은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와 나누고 싶다는 구애 발언까지 하면서 선거를 통한 조기 정권 교체에 미국의 협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무력으로 기존 권력을 붕괴시키는 정권교체 전략 대신 지도자만 제거한 뒤 기존 체제를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고쳐쓰기’ 전략을 택했다.
마두로 체포 군사작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석유 이권 장악은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추가 군사작전 압박으로 마두로 측근 그룹의 협조를 받아낸 트럼프는 먼저 미국의 봉쇄로 수출길이 막혀 저장 탱크에 보관 중인 원유 3000만~5000만 배럴을 손에 넣었다. 원유 수출을 막기 위해 다섯 번째 유조선을 해상에서 나포했고, 베네수엘라산 석유의 쿠바 공급을 차단했다.
이어 엑손 모빌, 셰브런 등 미국 정유회사 CEO를 백악관으로 불러 모아 “안전을 보장할 테니 원유를 채굴하자”며 1000억 달러 투자를 독려했다.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이 개입해 석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겠다고 했다. 석유 판매 수익을 미국 재무부 계좌에 예치한 뒤 사용하겠다는 트럼프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 계좌를 압류나 사법절차로부터 보호하는 행정명령까지 서명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베네수엘라산 석유 판매를 막아온 제재 해제 의사를 밝혔다.
석유 수출 봉쇄해 중국 경제 타격 석유 판매에 따른 당장의 현금 확보와 함께 미국의 숨은 의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해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그간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을 토대로 중남미 국가들을 우군화했다. 차베스-마두로 정권과 밀착해온 중국은 현재 약 700억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한 베네수엘라 최대 채권국이다. 이 차관의 대부분은 석유를 담보로 한 자원 담보형 대출이다. 마두로 정권은 중국에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채무를 상환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자국 에너지 수급의 안전장치로 활용해 왔고, 이를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중국석유공사(CNPC)는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와 합작해 유전 개발, 정제 시설 및 수송 인프라 건설 등에 막대한 투자를 지속해 왔다.
하지만 이번 트럼프의 군사 개입으로 중국은 투자금 회수가 어려워진 것은 물론 향후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반면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 전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 대체 가능성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중 패권 전쟁에서 중국에 희토류가 있다면, 이제 미국엔 석유가 있는 셈이다.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력도 약화 동시에 세계 2위 산유국인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력도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유럽연합(EU)이 제재 움직임을 보이자 에너지 수출 카드를 꺼내 들었다. EU의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러시아산 가스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놓고 EU 회원국들은 내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틈을 파고들어 자국산 LNG와 석유 수입 확대를 강하게 요구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베네수엘라 석유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공급(트럼프는 유가 상한선을 배럴당 50달러로 제시)할 경우 석유 및 가스 수출로 전시 국가 경제를 지탱해온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전략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동시에 동맹과 파트너국에 저렴한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미국은 효과적인 외교 레버리지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트럼프, 저유가로 중간선거 승리 노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선거 전략이기도 하다. 트럼프 지지율 추이를 보면 현재 보수층 지지율은 여전히 견고한 편이지만, 취임 이후 극우 성향의 강경 정책 추진으로 중도 및 청년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전체 지지율이 40% 초·중반대로 떨어졌다. 과거 선거에서 고유가와 인플레이션 상황은 집권당에 최대 악재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저렴한 베네수엘라산 석유 공급과 이를 통한 인플레이션 우려 해소를 통해 중간선거 승리를 위한 환경 조성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에 과거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그레나다 침공(1983년)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2003년) 사례처럼 ‘힘을 통한 평화’를 구현하는 리더십 이미지는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민주당의 친환경정책에 비판적인 남부 및 중·서부 유권자와 이른바 ‘독재의 삼각 축(베네수엘라, 쿠바, 니카라과)’이라고 불리는 국가를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해온 유권자들의 지지 확보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