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lace To Hide(한국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탐사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가 2014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시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을 기록한 책의 제목이다. ‘숨을 곳이 없다’라는 말은 1975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관심을 모았다. 당시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은 정보기관의 감청 능력이 국민을 겨냥할 경우 더는 숨을 곳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보법 혐의자 표리부동 언행
감청 자료로 남김 없이 드러나
데이터 분석해 감정까지 파악
마두로 체포에도 톡톡히 활용
반세기 전 미국 상원의원이 경고했던 것은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정보기관의 감청 역량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오늘날 그 우려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의 주체는 국가뿐 아니라 민간과 개인으로까지 확장했다.
녹취 일상화로 드러난 정치인 민낯
근래 들어 정치인들의 사적 통화 내용이 녹취 형태로 공개되는 사례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통화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상대 역시 신뢰를 전제로 한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어느 날 갑자기 파일이 되어 떠돌고 텍스트로 정리되면서 정치인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증거로 기능한다. 대화를 은밀하게 기록하는 일이 권력기관만의 기술이 아닌 시대가 왔다. ‘사적 대화’라는 말은 현실에서 영역이 점점 좁아진다.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통화와 메시지, 검색 기록, 이동 경로, 소비 패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예외 없이 데이터로 남는다. 데이터는 저장 비용이 적게 들고 복제와 전송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한 번 생성된 기록은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축적된다. 다른 데이터와 끊임없이 결합해 개인의 통제 밖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낸다.
무한대로 확대하는 정보기관 감청
‘프라이버시 침해는 악의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기술 발전의 부산물에 가깝다’는 인식이 민간 영역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9년 당시 구글 CEO 에릭 슈밋은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하는 뭔가가 있다면 애초에 공개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역시 비슷한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사람과, 더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일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며 디지털 시대 프라이버시는 더는 사회적 규범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개인 정보가 보호의 대상이기보다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인식되면서 정보기관의 감청 범위와 역량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됐다. 과거의 감청이 특정 회선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감청은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패턴과 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통화와 메시지는 물론 위치 정보, 온라인 활동, 금융 기록까지 연결한다. 감청의 대상은 더 정교해졌고 감시의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제공한 문서에 따르면 NSA는 2009년 5월 기준으로 122명의 세계 각국 지도자를 감시 대상으로 분류한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와 관련된 파일만 300건이 넘었다. 감청은 일회적 대응이 아니라 상시적 정보 수집 체계였다.
미국 대통령 등 통신 분석하는 해커
2024년 말에는 중국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 등의 휴대전화와 메시지 계정을 겨냥한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정황이 보도됐다. 특정 통화를 엿듣는 수준이 아니라 통신 기록과 메타데이터를 수집해 권력 내부의 연결망을 파악하려는 시도로 해석됐다.
올 초에는 CIA·NSA·국가지리정보국(NGA) 등 미국 정보기관들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상대로 한 기습 작전에서 그의 동선과 위치, 생활 습관에 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이버 공격, 위성 정보, 통신 신호 감청이 결합한 현대의 정보 수집 방식은 이제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까지 세밀히 들여다보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일반 개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검토 중인 외국인 입국 허가 제도에 따르면 전자여행허가(ESTA) 신청자는 지난 5년간 사용한 전화번호와 10년간의 이메일 주소, 가족 구성원 정보는 물론 최근 몇 년간의 소셜미디어 기록과 얼굴 사진, 지문, 홍채 등 생체정보 제출까지 요구받을 수 있다. 잠재적 테러리스트, 범죄자, 기타 안보 위협 요인의 입국을 사전 차단하려는 조치이긴 하지만, 평범한 개인 역시 상시적 데이터 기반 검증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상이 돼가는 감청과 데이터 수집 감청과 데이터 수집은 이제 비밀스러운 예외 조치가 아니라 제도와 기술 속에 내장된 일상이 되었다. 감청은 이론이나 통계 속의 추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사람의 말과 관계, 감정이 데이터로 변환되는 순간이며 개인의 삶이 가장 무방비한 형태로 노출되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1990년대 중반 통신비밀보호법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내사하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들의 감청 자료에 뜻밖에도 내가 등장했다. 그들은 나를 ‘장가(張哥)’, ‘그놈’, ‘안기부 그 새○’라 호칭하며 돈이나 미인계로 엮어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늘 세상없이 선량한 얼굴로 나를 ‘장 선생님’이라 부르며 겸손을 떨던 그들이었기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간첩 수사는 비노출 간접활동이 원칙이지만, 상황에 따라 처음부터 신분을 밝혀야 할 때도 있다. 그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을 만날 때면 커피나 밥값은 예외 없이 내가 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직문화였고 안기부 직원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내가 저 인간들에게 커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셨더라면….’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한 인간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별의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면, 아마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감청을 통해 마주한 인간의 민낯은 이후 나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통찰로 남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감청과 감시는 이제 범죄 수사나 제한된 사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행동과 이동·일상을 실시간으로 포착하고 분석하는 체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극단에 가까운 사례가 바로 중국의 ‘천망(天網)’이다. 말 그대로 ‘하늘의 그물’이다. AI와 전국에 설치된 약 7억 대의 CCTV를 결합해 개인의 이동 경로와 행동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중국의 초대형 감시 시스템이다. 2017년 영국 BBC 방송의 중국 특파원이 천망의 위력을 직접 시험해 보았다. 자신의 얼굴 사진을 천망에 등록한 뒤 도심 한복판을 걸었다. 경찰이 그를 식별해 찾아낸 데 걸린 시간은 고작 7분. 숨을 곳은 없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엉성해 보여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기원전 5세기경에 노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구절이다.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숨으려 애쓸 것인가, 아니면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