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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의 시선] 김병기, 강선우 그리고 경찰의 시간

중앙일보

2026.01.1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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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 콘텐트2부국장
‘A 회장의 범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경찰청은 A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2007년 4월 30일 심야, 한 뉴스통신사에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가 떴다. 어이없는 ‘압수수색 사전 예고’였다. 경찰은 다음날 발부된 영장과 함께 그 대기업 회장의 자택을 찾았지만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공개 압수수색’ 현장은 취재진과 구경꾼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실소 대상이던 옛 경찰, 달라졌나
‘김병기 사건’은 중요 시험대
‘검찰 대체’ 의지와 능력 보여야

경찰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남대문경찰서의 K 과장은 쭈뼛거리며 초인종을 누르고 더듬거리며 용건을 말했다. 그리고는 십여 명의 수하를 투입해 압수수색 비슷한 행위를 하다가 두 시간 만에 철수했다. 그는 결과가 너무 뻔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사족으로 덧붙였다.

“오늘 압수수색에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검사들은 그런 경찰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아니, 세상에 압수수색 영장 신청 사실을 미리 공개하는 자들이 어디 있어? 미리 증거 인멸하라는 거야?”

당시 검찰을 출입하던 기자 역시 맞장구를 쳤다. 검찰이었다면 그런 식의 엉터리 압수수색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강제 수사의 생명은 밀행성(密行性)성에 있다. 보안 유지에 성공하면 수사는 절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2000년대 중반의 검찰은 그 분야에서 이미 체계가 확실히 잡힌 조직이었다. 압수수색 영장과 체포 영장에 관한 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다. 생래적으로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한 기자들조차 그 무렵에는 검찰과 그 중요성을 공유했다. ‘압수수색 영장과 체포 영장은 집행 이전에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최대한 지킨 이유다. 당시만 해도 이처럼 검찰과 경찰의 간극은 컸다.

세월이 흘렀다. 검찰은 멸종 위기를, 경찰은 부상(浮上) 호기를 맞았다. 예정대로 검찰이 해체되면 경찰은 새로 생길 중대범죄수사청과 함께 국가 수사 시스템의 중심이 된다. 중수청으로 검찰의 인력과 노하우가 얼마나 많이 넘어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당분간 경찰이 떠안을 짐이 더 크고 무거울 것이다. 국가수사본부 설립 등을 통해 인지 수사의 토대를 착실히 닦아온 보람을 제대로 느낄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경찰에 ‘김병기·강선우 사건’은 여러모로 중요한 시험대다. 제대로 수사한다면 경찰은 충분히 검찰의 대체재가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수사를 망친다면 “그러면 그렇지”라는 비아냥과 함께 경찰 중심의 미래 수사 시스템 전반에 대한 재검토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아쉽게도 경찰의 초기 대응은 우려를 낳았다.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던 강선우(현 무소속) 의원에게 공천 헌금 조로 1억원을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는 핵심 피의자 겸 참고인 김경 서울시의원은 자신 때문에 풍파가 몰아칠 때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CES 2026)’ 현장에서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사진 촬영을 했다. 경찰이 수사의 기초 중 기초인 출국금지를 하지 않아서다. 천만 다행히도 그가 ‘조기 귀국’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수년 동안 장기 미제로 남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가 조기 귀국했다고 해서 미국에서의 10여일을 없었던 셈 칠 수는 없다. 증거 인멸을 막을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나갔다는 의미다.

김병기 전 민주당 원내대표 관련 의혹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는 더욱 미심쩍다. 수사의 핵심은 속도인데도 몇 개월 동안이나 미적거린 흔적이 역력하다. 집권당 고위 인사라 뭉갰다면 큰 문제고, 수사 경험 부족으로 어설프게 대응한 것이라면 더 큰 문제다.

비록 결정적 순간의 정치 종속 때문에 망가졌지만, 검찰은 그래도 지난 수십년간 초대형 권력형 비리 사건들을 적지 않게 해결하면서 ‘국가대표 수사기관’으로서의 의지와 능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경찰은 아직 해당 영역에서 의지도, 능력도 보여준 적이 없다.

다행히도 민주당이 김 전 원내대표와 강 의원 퇴출 결정을 내리면서 수사 의지 측면의 부담은 크게 경감됐다. 이제 능력만 보이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시민이 지지하는 한, 우리는 흑과 백의 경계 위에 서 있을 수 있어. 어리석은 짓을 하면 세상은 우리를 검은색 쪽으로 떠밀겠지.”

일본 작가 사사키 조의 소설 『경관의 피』에서 한 경찰관이 내뱉은 대사다. 경찰은 지금부터라도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야만 검은색 쪽으로 떠밀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거다. 분발해야 한다.





박진석([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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