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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강자는 할 일 하고 약자는 감내한다"

중앙일보

2026.01.13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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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
“강자는 할 일을 하고 약자는 감내할 뿐이다.” 실감한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정수(精髓)로, 2500년 전 아테네가 중립국 멜로스에 항복하거나, 침공당하거나 하라며 한 말에서 유래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당시 아테네는 “‘당신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왜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멜로스는 반박하며 정의를 말했고, 신(神)을 말했고, 동맹을 말했다. 아테네는 냉소했다.

“우리의 지배권에 설사 종말이 오더라도 그걸 생각해 동요할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건 우리 지배권의 이익을 위해서며 귀 도시의 존망을 논의하기 위해서란 두 가지 점을 명백히 하고 싶다.” “그런 신은 우리에게도 많다. 신들의 세계에서 강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 “당신들은 자신의 생존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미래에 있을지 모를 희망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인가 생각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무감각하고 오만한 것이다.”
현실주의 앞세운 미·중 패권경쟁
전 지구적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대논쟁 통해 우리 방향 정리해야

마두로 축출 작전에서 미국이 마두로의 측근들에게 미국의 지침을 따르거나, 제거되거나 선택하라고 했다. 기시감이 들지 않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라고 했다. 누군가는 “미국이 힘과 자국 이익만으로 외교정책이 성립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라파엘 S 코헨)고 평했다.

트럼프의 ‘실험’이 현란하긴 하지만 트럼프만 그러고 있는 건 아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이란·그린란드 등은 개별 사안이 아니다. ‘원유’로 꿰어도 알 수 있다. 에너지 최대 수입국인 중국은 베네수엘라·이란·러시아로부터 (때론 유령 선단을 통해) 헐값에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서방 제재 때문이다. 전체의 20%가 제재 지역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만일 제값을 내야 한다면? 국제가스연맹 회장 출신의 에너지 전문가 강주명은 “일대일로(一带一路)도 단순하게 표현하면 중국의 석유·가스 확보망”이라며 “제재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으로선 이 체제가 흔들리면 힘들어진다”고 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유럽의 반발에도 러시아와의 휴전을 밀어붙이고, 이란 상황에도 개입하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연합뉴스

그린란드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가 요란하게 중국을 압박하다 물러선 게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린란드는 희토류 말고도 북극 항로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중국은 러시아를 통해 북극에 접근하고 있다. 트럼프는 오랜 동맹(유럽)과의 갈등도 불사하며 저지하고 있다.
한 서구의 전문가가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인 경쟁에 빗대어 “21세기 그레이트 게임”(라나 포루하)이라고 했다. “유럽·한국·일본·호주, 아프리카 일부와 라틴 아메리카 모두가 이 게임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들은 미·중 사이에서 이분법적이지 않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면서다. 공감한다.

80년간 미국의 안보 우산에 있던 유럽은 스스로 방어라는 낯선 숙제를 받아들었다. 러시아 혐오증과 “러시아를 약화시키면 그 자원을 중국이 장악하기 쉽게 만들 것”이란 현실론 사이에 길도 내야 한다.

우리도 역시다.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는 발언을 “공자님 말씀으로 들었다” “착하게 잘살자는 의미로 이해했다”고 넘기려 했는데 며칠 뒤 주한 중국대사가 한·미·일을 언급하며 국제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사실상 반박했다.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넘길 상황이 아니다. 핵을 가진 북한과도 ‘잘 지내자’만으론 어렵다. 대논쟁이 있어야 한다. 정권 때마다 달라지는 갈지자 행보론 신뢰를 얻기 어렵다. 방향만이라도 공감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치 양극화가 극심한 미국도 중국 견제엔 수긍한다.
결국 멜로스는 지워졌다. 우리의 생존이 걸려 있다.




고정애([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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