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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초고신용 시대의 역설

중앙일보

2026.01.14 07:20 2026.01.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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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경제부 기자
943.26점. 지난해 12월 말 은행연합회에 공시된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가계대출을 받은 이들의 평균 신용점수다. 1년 전(평균 935점)과 비교하면 8점 넘게 올랐다. 대출 종류를 주택담보대출(분할상환식)로 좁히면, 차주의 평균 신용점수는 950.6점까지 높아진다. 지난 2021년 사라진 신용 등급제(1~10등급)를 기준으로 보면 1등급(942점 이상)이 넘어야 시중은행의 대출 창구를 두드려볼 만하다는 뜻이다.

초고신용자가 넘쳐나는 신용 인플레이션 시대다. 신용평가사 코리아크레딧뷰로(KCB)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신용점수 951점이 넘는 인원은 약 1473만 명으로, 전체 인원(5044만 명)의 29%가 넘는다. 901점 이상(고신용자)으로 범위를 넓히면 국민 절반에 가까운 45.2%에 달한다. 시중은행 대출 가능 기준선이 ‘950점’이 뉴노멀로 자리 잡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은행권 대출 신용점수 기준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한 남성이 현금 자동 입출금기를 지나는 모습. [연합뉴스]
초고신용자에게만 대출이 허용됐다면 연체율은 낮아졌을까? 그렇지도 않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KCB 신용점수가 951~1000점 구간에서 차주의 연체액은 2024년 말 대비 29% 늘었는데, 이는 구간별 점수 중 가장 높았다. 즉 과거라면 낮은 신용 점수를 받았을 이들의 상환 능력이 과대평가 됐다고 볼 수 있고, 이렇게 상향 평준화한 신용점수는 점점 변별력을 잃어간다는 방증이다.

신용 초인플레이션 현상의 배경으론 코로나19 이후 수차례 실시된 대규모 신용사면이 꼽힌다. 물론 빚을 탕감하거나 연체 기록을 없애주는 신용사면의 역사는 몇몇 정권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면 규모가 빠르게 누적되며 신용점수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금융당국은 신용회복 지원으로 개인 신용점수는 평균 31점, 개인 사업자는 평균 101점 상승했다고 추산했다. 여기에 정부가 은행권에 가계대출 총량 감축을 주문하면서 은행 입장에서도 신용점수가 높은 이들 위주로 우선 대출을 내줄 수밖에 없게 됐다.

역설적으로 중·저신용자가 대출받을 길이 점점 좁아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은 제2금융권이나 불법 사금융으로 발을 돌릴 수밖에 없다. 금융 당국은 이재명 정부 출범 초부터 ‘포용금융’이란 이름으로 중·저신용자를 위한 정책상품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금융 시장의 기본 원리인 신용 평가 체계가 그 역할을 잃고 중·저신용자들이 제도권 밖으로 내몰린다면, 정책 지원 상품은 근본 해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실효성을 갖춘 정교한 신용 평가책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김선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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