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 사업 하나에 대학 전체가 사생 결단으로 매달린다. 1999년 BK21(브레인 코리아 21, 정부의 고등교육 인력 양성사업) 탈락에 분노한 연세대 자연대 교수들의 반발부터 최근 ‘글로컬대학 30’ 탈락에 따른 총장 책임론까지, 한국 대학가는 정부 지원금 전쟁터다. 미국과 홍콩 대학에서 재직했던 필자는 이런 풍경이 늘 안타까웠다.
프로젝트 공모, 연구생태계 왜곡
대학을 ‘정부 하청업체’로 만들어
‘혁신’보다 ‘양산’에 힘써온 한국
홍콩·영국처럼 질 중심의 평가를
AI시대, 창의적 연구와 통찰 중요
대학을 ‘혁신의 산실’로 만들어야
또한 특정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일정 기간 다른 논문에 얼마나 인용됐는지를 측정한 영향력 지수인 임팩트 팩터(IF)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도 낯설었다. IF는 논문 수가 많은 분야가 유리하다. 경제학과 의학계 최고 저널의 IF는 수 배 이상 차이 난다. 이 때문에 해외 학계는 수치화된 IF보다 질적 평가와 동료 평판을 더 중시한다.
이뿐이겠는가? 대한민국 학계는 오랫동안 많은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겨왔다. 양적 성장은 이뤘으나 연구의 진짜 혁신과 임팩트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제 연구 생태계의 판을 점검하고 전환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연구 생태계 옥죄는 5대 장애물 대한민국 대학의 혁신 부족은 연구자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보다는 제도 설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 장애물은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프로젝트 중심 지원 체계(PBS, Project Based System)의 함정이다. 현재 연구비 대부분이 용처가 정해진 프로젝트형이다. 연구자는 독립적 탐구자보다 국가사업의 과제를 수행하는 대리인이 된다. 연구가 진리 탐구가 아니라 정부 하청업체의 업무처럼 전락한 환경에서, 실패를 무릅쓴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해외는 기관 자체를 지원하는 블록 펀딩 (영국·홍콩)이나 기금형 (미국)이 우세하다〈표1〉.
둘째는 창의성을 제약하는 톱다운(Top-down)식 접근이다. 물론 정부가 연구 주제를 기획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모든 예산을 연구자 자율(Bottom-up)에만 맡길 경우, 국가적으로 생존이 걸린 중요 분야가 소외되는 ‘시장 실패’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정한 주제 위주의 현재 우리 방식이 연구자의 자발적인 호기심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모 아니면 도’ 식의 펀딩 구조다. 수백억원 규모의 사업이 단 1점 차이로 결정된다. 정부 주요 사업에서 탈락한 대학은 후폭풍에 시달린다. BK21에 탈락한 학과는 연구실 운영비, 대학원생 장학금 등 기초 인프라 전반이 흔들리는 등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미국 역시 프로젝트 기반의 경쟁적 펀딩이 주를 이루지만, 미국 대학은 연구비 총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펀딩 소스가 다양해 특정 사업 하나에 연구실의 존폐가 결정되는 일은 드물다.
넷째는 양적 지표와 편협한 질 평가다. 논문 편수와 IF 중심 평가는 연구자를 ‘평가 기준에 맞춘 연구 전략’으로 이끈다. 의학과 과학계에서 IF 10이 좀 넘는 특정 저널군에 논문을 공장처럼 양산하는 학자가 많은 이유가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다섯째는 자국 중심의 폐쇄성이다. 행정과 심사가 국내에 국한되어 ‘우리끼리의 리그’가 된다. 글로벌 공동연구를 외치지만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 연구자가 자력으로 연구비를 신청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은 외형적 성장을 이루었다.
과학 분야 SCI급 논문 수는 세계 12위권이다, 그러나 내실은 부족하다. 지난해 서울대 자연과학대의 자체 진단은 대한민국 최고 학부의 민낯을 드러냈다. 양적 지표에서는 세계 상위권이나, 국제 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낮았다. 이는 수십 년간 ‘혁신’보다는 ‘양산’에 치중해온 결과다. 이제는 글로벌 학계에서의 실질적 파급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리나라 연구 예산의 약 90%가 목적형 프로젝트 사업인 반면, 홍콩은 대학에 직접 배분되는 자율 블록펀딩 비중이 25~30%에 이른다. 이 시스템은 성과를 학과별 정원과 교수 채용 정원(T/O) 등 대학 운영 전반에 유기적으로 연동시킨다. 평가 결과가 대학의 인사권과 조직 설계에 즉각 반영되기에, 대학 본부는 정부 지시 없이도 스스로 조직을 연구 최적화 구조로 재설계하게 된다.
첫 번째 평가 기준은 ‘딱 4편의 대표 논문’과 ‘글로벌 동료평가’다. 교수는 6년간의 논문 중 가장 의미 있는 연구 네 편만 제출한다. IF 수치라는 간접 지표 대신 연구의 깊이와 기여도라는 실질 가치를 직접 판단한다. 만점이 100점이라면 각 논문의 비중은 25점. 톱 저널에 4편을 실었다면 만점에 가깝다. 연구자는 수량 경쟁보다 혁신적인 연구에 집중하게 된다.
두 번째 기준은 ‘연구 환경(Envir onment)’이다. 대학이 연구자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지 측정한다. 가령 시니어 교수의 경험과 신진의 창의성이 결합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했는지를 평가한다.
세 번째 기준은 ‘사회적 영향력(Impact)’이다. 연구가 상아탑을 넘어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입증해야 한다. 정책 변화나 경제적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 관료의 서면 확인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엄격하다. 필자도 2023년 홍콩과기대 재직 당시, 연구의 사회적 기여 잠재력을 인정받아 “근거 기반 정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라”며 약 2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연구비’라는 이름 아래 연구자로서 낭만과 비장함을 동시에 느낀 순간이었다.
물론 RAE도 만능은 아니다. 행정 부담과 형식적 임팩트 평가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연구의 양이 아니라 무엇을 남겼는지를 묻는 평가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통해 주어지는 자율 예산은 검증된 연구자들에게 ‘자율성’이라는 비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수준이 낮은 연구 양산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다. 하수가 사사건건 간섭할 때, 고수는 연구 생태계의 판을 짜고 신뢰를 던진다.
연구 평가의 새로운 5대 원칙 현 정부는 소위 ‘서울대 10개 만들기(국가균형성장을 위한 지방대학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거점국립대에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똑같은 금액을 나눠주는 자원 낭비 대신, 검증된 실력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연구 평가제도 도입은 이미 추진반 내에서 충분한 공감대를 얻은 사안이다. 이참에 대한민국 대학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평가 체계의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신뢰 기반 ‘통합 블록 펀딩’의 과감한 확대. 현재 ‘지방대학 육성’, ‘글로컬 대학’, ‘대학 혁신 지원’ 등 블록 펀딩 성격의 사업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다. 이제는 이들을 하나로 모으고 규모를 키운 ‘통일된 블록 펀딩’ 체계가 필요하다. 평가 점수에 비례해 총액 예산을 배분하되, 구체적인 사용처는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둘째, 대표 연구 중심의 질 평가 전환. 연구자당 3~4편의 대표 논문의 실제 가치를 심사하자. 톱 저널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이 평범한 논문 백 편보다 가치 있다는 사실을 시스템이 반영해야 ‘논문 공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글로벌 동료 평가 도입. 우물 안 개구리식 심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심사를 영어로 진행하고, 국내외의 석학들에게 맡겨,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홍콩 RAE는 공정성과 전문성을 위해 패널의 65%를 해외 석학으로 구성한다.
넷째, 연구 행정의 완전한 영어 공용화. 글로벌 협업을 외치며 연구비 공지를 ‘아래아한글(hwp)’로 하는 모순부터 당장 끝내야 한다. 한국어 구사 여부, 국내 체류 여부, 국적과 상관없이 연구비 신청부터 집행, 보고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가능해야 한다.
다섯째, ‘사회적 영향력(Impact)’을 반영. 상아탑을 넘어 연구가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기술 이전, 치료 가이드라인 변화, 정책 반영 등 구체적 증거를 요구하는 ‘임팩트 케이스 스터디’를 도입하자.
AI 시대의 새로운 연구 가치는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AI 시대의 연구 가치다. 이미 웬만한 논문은 데이터를 주면 AI가 분석하고 써낼 수 있다. 이런 ‘채우기 식’ 논문은 더 이상 성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제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 즉 존재하지 않던 질문을 던지는 창의적 연구와 심층적 통찰이 담긴 연구만이 진짜 성과로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 대학을 ‘프로젝트 따내기 경쟁터’로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혁신의 산실’로 만들 것인가? 실력이 검증된 대학과 연구자에게 자율성을 담보하며 과감히 맡겨라. 그것이 멈춰 선 대한민국 대학 경쟁력을 깨우는 확실한 길이다.
김현철 연세대 인구와 인재연구원장·연세대 의대 교수
Reference.
· University Grants Committee (Hong Kong), "Research Assessment Exercise (RAE) 2020 Results & Guidance Notes".
· UK Research and Innovation (UKRI), "Research Excellence Framework (REF) 2021: Outcomes and Main Panel Reports".
· Higher Education Funding Council for England (HEFCE), "Quality-related research (QR) funding: Guidance and allocation metho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