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치밀지만, 한편으로는 교훈도 얻는다. 각종 논란에 독선적으로 대응하는 쿠팡의 행태를 보면서 그간 ‘진짜’ 한국 기업이 짊어졌던 규제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어서다.
우선 공정거래법상 ‘동일인 지정’ 제도. 1986년 도입된,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규제다. 자산 5조원이 넘는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되면 총수 개인은 친인척의 주식 소유 현황과 거래내역 등을 낱낱이 공시해야 한다. 사소한 누락이나 오류에도 ‘형사처벌’이라는 칼날이 기다린다. 이 때문에 해당 기업들은 제출일이 다가오면 주식 소유, 가족관계 현황 등 서류의 홍수에 파묻히곤 한다. 하지만 쿠팡은 예외다. 김범석 의장은 실질적 지배주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적자, 통상 마찰 우려 등의 이유로 이 규제를 비껴갔다. 덕분에 김 의장은 동일인에게 적용되는 일가와 특수관계인의 사익 편취 제재 등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무늬만 외국기업’ 응징하자지만
자칫 맷집 키워 나쁜 전례될 수도
한국 기업에 쿠팡식 ‘경영 자유’를
쿠팡을 키운 건 역설적으로 규제다. 2012년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 대형마트는 월 2회 공휴일 의무 휴업을 해야 하고,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온라인 배송도 할 수 없다.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대형마트의 손발을 묶었지만, 정작 소비자는 전통시장을 가는 대신 스마트폰을 켰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이 묶여 있는 사이, 쿠팡은 ‘로켓배송’을 내세워 물류망을 장악했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보여준 쿠팡의 태도는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쿠팡의 기업 지배구조 또한 한국에선 불가능한 형태다. 김 의장은 주당 29배의 의결권을 갖는 ‘클래스B’ 주식을 통해 단 9%의 지분으로 73%가 넘는 지배력을 행사한다. 한국 상법상 허용되지 않는 이 ‘차등의결권’ 덕분에 쿠팡은 경영권 위협을 받지 않고 막대한 외자를 유치하며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국내 벤처업계선 적대적 M&A 위험을 줄이기 위해 ‘차등의결권’ 도입을 계속 건의해왔지만, ‘편법 세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정치권의 논리로 제도 도입은 번번이 좌절됐다.
무엇보다 국민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건 권한은 누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 ‘선택적 태도’다. 쿠팡에서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잇따르던 2020년 말, 중대재해처벌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2021년 1월)에 앞서 그는 한국 법인의 공식 직함을 내려놓았다. 쿠팡 임원들은 최근 쿠팡 사태 전후로 주식을 대량 매각했는데, 국내 상장사였다면 금융당국은 물론 검찰·경찰이 계좌내역과 통신기록을 탈탈 털었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대형 스캔들이 터지면 국내 대기업 총수들은 비난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사회적 책임과 국민에 대한 예의로 국회에 출석했다. 하지만 김 의장에게는 ‘미국 법인 경영’이라는 명분이 국회 불출석의 면죄부가 된 모양새다. 이러한 쿠팡의 행태들은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빅테크에게 나쁜 ‘참고서’가 되고 있다.
이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하나는 쿠팡과 같은 사례처럼 한국의 제도를 악용하지 못하도록 ‘무늬만 외국 기업’에 대해 규제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쿠팡이 활용하는 ‘미국식 대처’가 한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쿠팡이 이번 일을 계기로 되려 맷집만 키우고 달라지지 않는다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앞으로 다른 기업들은 대형 로펌의 비호 아래 “법대로 하라”면서 사과나 타협을 회피할 것이다. 수많은 유망 스타트업은 한국의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 증시 대신 미국 증시로 향한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재벌 2·3세가 앞으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미국인 CEO라는 신분을 방패 삼아 책임 경영을 회피하는 일 또한 늘어나지 않겠나.
다른 선택지는 유통기한이 지난 한국식 규제를 글로벌 수준에 맞게 손보는 것이다. 쿠팡이 보여준 경영의 자유와 효율성을 한국 기업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다. 대신 한국에서 수익을 내는 기업엔 국적과 상장시장을 막론하고 동일한 잣대의 책임감을 지게 하면 된다. 이는 규제 적용 실패에 따른 부작용도, 외국인 투자 위축이나 통상 마찰로 번질 위험도 없다.
마음은 전자에 끌린다. “잘못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처럼 검찰·국세청·공정위 등 가용한 행정력을 총동원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머리는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쿠팡을 때린다고 해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쿠팡을 규제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보다는, 우리 기업을 규제 밖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한국의 산업 생태계를 살리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훨씬 도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