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가 최소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이란 정부의 시위대 유혈 진압에 대해 미국과 일본, 유럽 국가 등이 일제히 이를 규탄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시위가 18일째 이어지도록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군경이 무차별 사살했다는 증언이 쏟아지는 가운데 'K-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권·민주주의 탄압 앞에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자비한 시위대 진압에 국제사회는 들끓고 있다. 특히 대규모 유혈 진압이 이뤄진 지난 8~9일 이후 규탄 메시지가 쏟아졌다. 호주와 캐나다, 그리고 유럽연합(EU) 외교장관들은 지난 10일 공동 성명을 통해 “존엄성과 평화적 시위라는 기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란 국민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며 “이란 정권이 자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시위대 살해와 폭력 사용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해당 국가들은 한국과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대표적 유사입장국들이다. 이들은 또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바시즈 민병대를 포함한 보안군의 과도하고 치명적인 무력 사용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영국에 본부를 둔 반체제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13일(현지시간) 시위대 사망 사례 대부분이 이란 신정체제를 수호하는 이슬람혁명수비대와 이와 연계된 준군사조직 바시즈 민병대 소속 대원들의 총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본도 지난 11일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상 명의의 성명을 통해 “상황 악화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며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어떠한 무력 사용에도 반대하며 즉각적인 폭력 중단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영국 역시 13일(현지시간) 이베트 쿠퍼 외무장관이 하원 연설에서 “끔찍하고 잔혹한 이란 시위자 살해를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한다”고 말했다. 쿠퍼 장관은 "전면적인 대이란 제재를 추가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미국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13일(현지 시간) 트루스소셜에 "살해하고 학대하는 이들의 이름을 남겨라. 그들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밝히는 등 지원 및 개입 의사를 밝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정부가 반정부 시위대를 대상으로 사형을 집행할 거란 관측에는 14일 "이란에서 살해가 중단되고 있으며 처형 계획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 앞선 입장과 다소 결이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미국이 직접 개입까지는 아니어도 제재나 협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란을 압박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이란 사태와 관련해 지금까지 어떤 입장도 내지 않고 있다. 외교부 차원의 조치는 지난 13일 김진아 2차관 주재로, 지난 5일에는 윤주석 영사안전국장 주재로 본부-공관 합동 상황점검회의를 개최한 정도다. 이는 교민 안전을 점검하는 목적이었고, 사태 자체에 대한 별도 입장 표명은 없었다.
이는 서방 주요국이 일제히 외교 수장 등 고위급에서 강도 높은 규탄 메시지를 내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역사적 아픔을 겪었고, 국제사회에서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대한 아쉬움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외신과 국제 인권단체 등이 전하는 이란 현지 상황은 참혹하다. 1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란 보건부 고위 관리 등을 인용해 “시위 진압과정에서 보안요원 수백명을 포함해 최소 3000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미국 CBS는 이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시위 진압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1만 2000명에서 많게는 2만 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도했다.
군이 의도적으로 시위대의 눈과 머리를 조준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NYT는 자동소총과 저격수에 의해 머리와 가슴 등 급소를 맞은 총상 환자와 시신이 테헤란 병원과 거리에 쏟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 당국은 외부로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8일부터 전역에 통신망을 차단해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란 사법부는 지난 14일 체포된 시민들에 대해 재판과 형 집행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힌 수감자들이 적법한 절차에 따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란에선 지난해 12월 말부터 경제난 속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폭등하면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당국의 무차별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매일 밤 거리로 나와 이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를 겨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