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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공단 담배소송 패소…의료계 "암·흡연 인과성 명백한데 이해 안 돼"

중앙일보

2026.01.15 00:26 2026.01.15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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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 2심 패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흡연 폐해 손해배상 소송(담배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담배회사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공단 측 주장이 또 기각된 것이다. 보건의료계는 재판부가 흡연이 '개인의 선택'이란 판단을 재확인했다면서, 암·흡연 인과성이 인정되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6-1부(부장 박해빈)는 15일 건보공단이 KT&G·한국필립모리스·BAT코리아에 제기한 담배소송의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항소를 기각했다. 소송가는 공단이 30년 이상 흡연 후 폐암·후두암 진단을 받은 환자 3465명에 지급한 진료비 533억원이다. 2014년 재판이 시작된 지 약 12년 만에 나온 항소심 판결이다. 앞서 2020년 1심에선 공단 청구가 기각됐는데,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소송의 핵심 쟁점은 ▶담배회사의 제조물 책임·불법행위 여부 ▶암·흡연의 인과성 ▶공단의 직접청구 여부와 손해액 범위였다. 특히 전문가와 건보공단은 암·흡연 인과성 입증에 초점을 맞췄다. 폐암·후두암 발생에 담배가 주된 원인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할 소송 대상 환자들의 진단서 등 의무 기록도 제출됐다.
15일 서울역 인근 흡연구역에서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뉴스1
하지만 항소심에선 주요 쟁점과 관련한 공단 측 주장이 사실상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각에선 일부 환자라도 흡연 인과성이 확인될 수 있다고 내다봤지만, 재판부는 "역학적 연구 결과가 특정 개인의 질병 원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지 못 하는 한계가 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김열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교수(대한금연학회장)는 "폐암·후두암과 흡연의 관계는 술 먹고 운전하다 사고 내면 음주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그만큼 명백한 인과성을 갖는다는 의미"라면서 "이번 판결은 많은 과학자가 확인한 의학적 결과를 법으로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현숙 신한대 간호학과 교수(전 대한금연학회 회장)도 "법원은 담배 사용은 유해성을 인지한 개인의 자유 의지라고 했지만,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금연할 수 있는 경우는 5%에 불과하다"라며 "이를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나. 이는 명백한 중독성을 뜻한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번 판결이 '흡연=개인의 책임'이란 사회적 인식을 굳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흡연을 일종의 기호식품 선택처럼 여기고, 그 폐해를 사회적 비용으로 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깔린 거 같아 아쉽다"라고 말했다. 김열 교수도 "중독성 강한 담배를 팔고 홍보해온 사업자 대신 흡연을 시작한 개인에 책임을 지우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15일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점원이 진열된 담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담배 소송은 공공기관이 담배회사에 직접 손해배상을 요구한 첫 사례다. 이에 따라 판결의 후폭풍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담배업계가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한 만큼, 이들 회사에 흡연의 책임을 물을 길이 사실상 사라지고 국민 건강권을 내세운 금연 정책도 타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진행된 흡연 폐해 관련 개인 소송 3건도 모두 원고 패소로 마무리됐다.

이성규 센터장은 "이런 판례가 쌓이면 흡연자 개인이나 미래 세대가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는 소송을 걸기 어려워지고, 신종담배 마케팅 등도 날개를 달게 될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가입한 국제적인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이행할 동력도 상실될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민경 인하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도 "담배 회사의 논리가 옳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키울 수 있다. 향후 일상에서 발생하는 각종 유해물질 노출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건보공단은 판결 직후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기석 이사장은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며 "담배 유해성에 대해 법원이 아직도 유보적 판단을 한다는 것은 비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종훈.김보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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