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 1학년이던 1971년, 학교에서 소풍 사진 콘테스트를 열었다. 소년 박용만은 아버지가 예전에 쓰던 리코 플렉스 카메라를 들고 갔다. 구멍 난 러닝셔츠 바람의 아이가 빈 병 주우러 다니는 모습을 한참 쫓아다녔다. 병을 들고 철조망 넘는 장면을 찍어서 냈다. 교내 사진전 가작. 이후 아버지에게 아사히 펜탁스 스포매틱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15일 박용만(71) 대한상의 전 회장은 “미술은 잘하지 못했지만, 사진 찍어 상 받고 인정받는 세계가 너무 좋았다”고 돌아봤다. 서울 중구 남창동 피크닉에서 16일부터 여는 개인전 ‘휴먼 모멘트(Human Moment)’에서다. 사진으로 마주한 인간적 순간을 되짚는다는 의미로 붙인 제목이다. 50년 넘게 찍은 사진 중 80점을 골라 걸었고, 200여점을 수록한 동명의 사진집도 냈다. 사진집도, 사진전도 처음이다. “여기서부터는 사진가 박용만으로 만나겠습니다”라고 전시장 입구에서 인사한 그는 “조금 두렵고, 그래서 설렌다”고 했다.
Q : 개인전 처음이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A : "자신이 없어서다. 남들에게 사진을 보이고 평가받을 자신이 없었다. 주위에서 사진 달라고 해도, 인화해준 건 네 장뿐이었을 정도다."
Q :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나.
A : “지금도 자신은 없다. 다만 나이가 있기에, 한 번쯤은 이 시점에서 평가받고 남은 기간 사진을 더 찍고 싶다는 생각에 1년 전부터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에는 1980년대 수교 전의 중국, 88 서울올림픽의 성화봉송 같은 시대를 상징하는 장면부터 장남(박서원 전 두산매거진 대표)의 어린 시절 장난기 어린 표정과 아내의 젊은 시절 모습 등 개인적 추억이 담긴 사진까지 고루 걸렸다. 파리 어느 공원 벤치에 앉은 지친 관광객 부부 뒤에서 뜨겁게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 커플, 홍콩 거리에서 사진 찍는 자신을 노려보는 할머니 등 유머러스한 순간도 눈에 띈다. 가수 양희은이 데뷔 35주년 기념 앨범 재킷으로 썼던 사진도 나왔다. 그는 “좋은 사진의 객관적 기준은 없지만, 다시 보고 싶은 사진들, 사람이 있거나 사람의 자취가 있는 사진들, 편안하고 따뜻한 것들을 골랐다”고 말했다.
작품 곳곳에 그가 좋아하는 요소인 빨간색 모티브와 프레임 안의 프레임 구도가 등장한다.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전시장에 따로 명제표는 없다. “설명이 많으면 보는 분들께 편견과 선입견이 생긴다. 아마추어의 첫 사진전이라, 그냥 사진만으로 공감해 주시길 바랐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한때 사진기자를 꿈꿨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난 뒤 접었다. 1990년엔 회사를 그만두고 사진가가 되려 준비하다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 “사진가로 성공해 아내와 아이들을 편안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Q : 사진은 언제 찍었나.
A : “혼자 있을 때 주로 찍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어 배우러 간 반년 동안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해, 출장 가서 혼자 남으면 찍었다.”
Q : 글쓰기에선 소설가 박완서를 동경한다 말한 바 있는데, 사진에서는 누구인가.
A : “박완서 선생의 글이 편안해서 좋아한다. 교실에서 사진 배운 적은 없지만, 사진집만큼은 정말 많이 봤다. 사울 레이터, 매그넘 사진가 브루노 바비를 좋아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운구를 존경한다. 사진으로 장난치는 것 절대 허락이 안 되는 분이다. 돌직구 스타일이어서 사진뿐 아니라 사업에 대한 조언도 많이 구했다.”
전시장 마지막의 흑백 사진들은 소외된 이들의 뒷모습이나 양극화의 장면들이다. 그는 “국민소득 3만 6000달러 시대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현실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2021년 두산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재단법인 같이걷는길 이사장으로 동대문 지역 상생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시장 출마설도 나오는데, 그는 출마 가능성은 0%라고 일축했다. 전시는 2월 15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