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개봉한 영화 ‘쿨러닝’은 눈이라곤 본 적 없는 자메이카 육상선수들이 봅슬레이에 도전하는 실화를 다뤘다. 1988 서울 올림픽 선발전에서 탈락한 주인공 데리스 배녹이 동료들과 팀을 꾸려 동계 올림픽으로 향하는 여정은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지금, 다음 달 개막하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도 제2의 ‘쿨러닝’을 꿈꾸는 도전자가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여성 스켈레톤 선수 니콜 버거(32)가 그 주인공이다.
남아공 최초의 여성 슬라이더 올림피언을 꿈꾸는 버거의 일대기는 15일(한국시간) 대회 조직위원회 인터뷰를 통해 공개됐다. 1994년 케이프타운 벨빌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버거는 타고난 운동 수재였다. 육상과 승마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10대 후반, 육상의 꽃이라 불리는 여자 7종경기(허들, 포환던지기, 높이뛰기, 200m 달리기 등) 유망주로 촉망받았다. 하지만 고질적인 부상이 발목을 잡으며 트랙을 떠나야 했다.
좌절의 순간 버거가 잡은 다음 기회는 7인제 럭비였다. 대학 시절 시작한 럭비에서 그는 폭발적인 주력을 앞세워 명문 클럽 주전으로 활약했다. 평생의 목표인 ‘올림피언’이 되기 위해 조국 남아공의 국가대표 선발을 노렸으나, 끝내 올림픽 본선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영국 공군(RAF) 입대를 선택하며 인생의 항로를 틀었다.
반전은 군 복무 중 찾아왔다. 영국 공군 내 봅슬레이·스켈레톤 체험 공고를 접한 것이 운명적인 전환점이 됐다. 순간적인 폭발력이 필수인 스켈레톤은 육상과 럭비로 단련된 버거에게 최적의 종목이었다. 현재 장교로 복무 중인 버거는 “조국을 대표하려던 꿈이 무너졌을 때 공군 교육 과정에서 스켈레톤을 만났다”며 “몸과 본능에 의지해 썰매를 조종하는 순간은 통제와 혼돈이 뒤섞인 마법 같은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스켈레톤 입문 5주 만인 2023년 12월 유럽컵을 통해 데뷔한 버거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특히 2024년 대한민국 평창에서 열린 스켈레톤 월드컵에 출전하며 남아공 여성 최초의 월드컵 출전 기록을 썼다.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 센터는 그에게 올림픽을 향한 확신을 심어준 약속의 땅이 됐다.
이제 버거의 시선은 밀라노의 얼음 트랙으로 향한다. 현재 세계랭킹 17위인 그는 쿼터 배정 원칙에 따라 남아공 최초의 여성 슬라이더로서 올림픽 본선행이 매우 유력하다. 버거는 “겨울 스포츠는커녕 스켈레톤도 몰랐던 내가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며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다면 절대 믿지 못할 것”이라며 벅찬 소회를 전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자란 소녀가 영하의 기온을 뚫고 시속 100㎞ 이상의 속도로 얼음벽을 가른다. 동계 스포츠의 불모지에서 피어난 버거의 집념은 2026년판 ‘쿨러닝’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응원을 받고 있다. 올림피언이라는 한 우물만을 파온 버거의 2026년판 쿨러닝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