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미의 유튜브 코미디 ‘중년 남미새’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누군가는 통쾌한 풍자라 하고, 누군가는 여성 비하라고 비난한다. 이 콘텐트는 중년 여성을 조롱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적 병리를 꼬집는 것일까. 재빨리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는 이 코미디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기보다, 지독할 정도의 재현만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현실 들춘 코미디 논란
성급하게 옹호나 비난하기보다
왜 불편한지 스스로 살펴봐야
화면 속 50대 여성은 명품 로고가 선명한 액세서리를 착용한 채 남직원에겐 노골적 호의를, 여직원에겐 “눈웃음 살살 치는 스타일”이라며 악담을 한다. 외아들에 대한 맹목적 애정과 “요즘 여자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같은 편견 섞인 발언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강유미는 이 인물을 그저 보여줄 뿐, 해석의 전권은 관객에게 넘어간다.
풍자는 장르적 약속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맥락과 아이러니를 읽어내는 능력이 없다면 풍자는 쉽게 공격으로 오독된다. 특히 확증 편견이 연료가 되는 유튜브 같은 공간에서 풍자는 쉽게 혐오의 정당화로 돌진한다. 실제로 일부 시청자는 여기서 “저런 여자들은 비하당해도 싸다”는 메시지를 추출했고, 이 불편함을 제거하고 사과할 것을 강유미에게 요구했다.
그동안 강유미는 인간 군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며 ‘코미디 인류학자’라는 칭송을 쌓아왔다. 그런 그가 비난의 과녁이 된 것은 이번만 풍자의 칼날이 어긋났기 때문일까. 나는 이 논란을 지켜보며 ‘풍자냐 비하냐’라는 이분법적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강유미의 코미디는 일종의 ‘불쾌한 거울’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민낯을 징그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비춘다. 관객은 웃으면서도 가슴한구석이 섬뜩해지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이는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닮았다. 인간과 너무나 똑같아서 구별하기 힘든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본능적 거부감. 강유미의 코미디는 실제 현실과 너무 닮아 있는 그 지점에서 작동하며 우리를 심리적 언캐니 밸리로 밀어 넣는다.
흥미로운 것은 거울 앞에서 나타난 반응의 스펙트럼이다. 맘 카페를 중심으로 “아들맘에 대한 희화화”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자, 댓글창에는 영상 속 캐릭터 같은 어른들 밑에서 자란 아들들에게 성희롱과 혐오를 겪고 있다는 여학생들의 호소가 쏟아지며 논란은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같은 거울 앞에서 있지만 누구는 피해자를, 누구는 가해자를 본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공포, 편견을 이 영상 위에 투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 불편함이 대상에 대한 혐오인지, 뒤틀린 현실을 직면한 수치심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편을 가른다. 도덕적 선명함을 얻기 위해 서둘러 비난이나 옹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은 콘텐트가 지닌 풍부한 내러티브의 결을 지워버린다. 코미디가 도덕적 선명함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무미건조한 훈화 말씀에 불과할 것이다. 진정한 코미디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대면하게 만듦으로써 사유를 촉발한다.
예술은 정답보다 질문을 던지는 법이다. 때로는 폭력과 풍자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하며 현실의 얼룩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얼룩을 놓고 누구는 천사를, 누구는 악마를 보는 것이 대중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비하인가?’라는 닫힌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똑같은 현실을 마주하며 이토록 다르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불편함 속에 이 질문을 던지게 했다는 것 자체가 이 콘텐트가 이뤄낸 성취다.
우리는 너무 빨리 판결을 내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은 ‘좋아요’와 ‘차단’ 사이의 광활한 회색 지대를 지워버린다. AI는 복잡한 갈등이나 모호함을 노이즈나 오류로 분류하고 제거하려 하겠지만, 인간은 그 노이즈 속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와 슬픔을 읽어낼 수 있다. 시인 존 키츠는 성급하게 사실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불확실함 속에 머무를 줄 아는 능력인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하와 풍자를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정답 없는 모호함 속에서 사유를 지속하는 사회적 근육이 아닐까.
불편한 코미디를 만났을 때, 판결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멈춰보려 한다. 내가 불편한 이유는 저 영상 때문인가, 아니면 내 안의 어떤 그림자 때문인가. 거울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정답은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모호함을 견디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알고리즘의 이분법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된다. 도덕적 판결을 유예하고 결론 나지 않는 상태를 견뎌내며 질문의 층위를 쌓아가는 것, 그것이 강유미가 쏘아 올린 불편함에 대한 의미 있는 해석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