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강원도 동해와 삼척으로 여행을 떠났다. 신성한 쉰움산(683m)에서 해가 뜰 때 소원을 빌었고, 산에서 내려와 한섬해변을 거닐었다. 붉게 빛나는 태양과 시리게 푸른 바다를 가득 담고 2026년 병오년을 힘차게 시작해 본다.
별빛이 내린다, 야간 산행의 맛 오전 5시. 차 문을 열자 한기가 몰아친다. 세상은 어둠에 푹 잠겼다. 두타산(1353m) 천은사에서 헤드 랜턴을 켰다. 빛나는 것은 랜턴 빛과 하늘의 별빛뿐. 보는 것에 온 힘을 집중했으니, 눈에 불을 켠다는 말처럼 내 눈도 조금 빛났을지 모르겠다.
폐에 한발 들어갔다가 나온 차가운 공기가 허연 입김으로 사라진다. 빛이 어둠을 몰아낸 만큼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내디딘다. 야간 산행만큼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게 있을까. 걷다 보면 사념도 사라지고, 랜턴 빛이 어느덧 내 안을 비춘다.
딸깍! 헤드 랜턴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세상에나! 별빛이 쏟아진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별을 매달고 있다. 나도 두 팔을 벌려 손톱 끝에 주렁주렁 별을 매달아 본다.
산길을 오르다가 거대한 소나무를 만났다. 바위에 뿌리내리고 있던 나무였던 게 기억난다. 맞게 잘 가고 있다. 이윽고 돌탑 여러 개가 선 암반에 도착했다. 멀리 능선 위로 별 세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빛나고 있다. 그러다 별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착시겠거니 하면서도 신기하다. 지난밤 누군가가 세상을 등지고 별나라로 떠났으려나.
20분쯤 더 오르자 대망의 오십정에 올라섰다. 시간은 7시. 해가 뜨려면 30분쯤 남았다.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조망을 즐긴다. 검은 백두대간을 비롯한 산줄기들이 남쪽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바다 쪽으로 붉은 띠가 걸렸다. 사실 일출보다 이때가 더 멋지다. 어둠과 빛의 경계를 가르며 붉은 띠가 찬란하게 빛나는 바로 그때. 띠가 점점 사라지더니 불쑥 붉은 해가 솟구친다. 따뜻한 해를 얼굴에 가득 받으며 새해 소망을 빌었다.
하늘에 제사 올리던 오십정 쉰움산 정상인 오십정은 거대한 바위로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타산 중턱에 돌우물 50곳이 있으므로 오십정(五十井)이라 부른다. 그 곁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기우한다”라고 적혀 있다. 신사 흔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십정 입구에 너덜지대처럼 돌이 쌓여있는 곳이 아닐지 추측해본다.
쉰움산에서 일출을 보고 다시 천은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만약에 이 코스가 무료하게 느껴진다면, 두타산 베틀바위에 다녀와도 좋다. 단, 워낙 험한 코스이기에 본인의 체력과 산행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십정에서 끝없이 이어진 능선을 1시간쯤 따르면 갈림길을 만난다. 두타산 정상과 베틀바위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이다. 여기서 두타산 정상은 왕복 1시간 30분쯤 걸린다.
이 길은 긴 능선을 따라야 한다. 왼쪽으로 두타산에서 청옥산, 그리고 고적대로 백두대간 능선이 장쾌하게 흘러가고, 오른쪽으로는 올라왔던 쉰움산 능선과 바다가 아른거린다. 대궐터, 베틀봉 등을 차례로 지나면 베틀바위를 만난다. 이곳 전망대에서 창검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모인 베틀바위 일대를 감상할 수 있다. 이어 두타산성을 지나면 무릉계곡으로 내려오게 된다.
『제왕운기』 천은사에서 쓰였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천은사로 내려간다. 쉰움산과 두타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품 있는 금강소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길섶으로 미끈한 소나무가 가득하다. 돌탑이 있는 거대한 암반에 닿았다. 암반 밑에 테라스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도 닦기 좋은 곳이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1224~1300)가 여기서 수도했을 것 같다.
이승휴의 외가가 삼척 두타산 아래 구동(龜洞)이다. 이승휴는 1252년 과거에 급제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에 갔다가 발이 묶였다. 이 지역을 침략한 몽골군 때문이다. 이후 12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승휴는 1280년 충렬왕(1236~74)을 비판했다가 파직된 후 다시 두타산을 찾았다. 구동에 은거하며 용안당(容安堂)이란 집을 짓고 『제왕운기』를 썼다. 용안당이 지금의 천은사다. 『제왕운기』는 충렬왕을 위해 썼다. 단군 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 지점으로 보았고,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산행이 끝나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바닷가로 이어진다. 동해의 한섬해변을 찾았다. 걷기 좋은 데크로드 산책로(해파랑길 33코스)를 따라 여유롭게 걷는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수평선이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날이 추워 바다가 더욱 푸르다.
묵호항역을 거쳐 묵호 시내로 들어왔다. 요즘 묵호가 젊은이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평일에도 사람이 제법 많다. 채지형·조성중 작가 부부가 운영하는 여행책방 ‘잔잔하게’도 들르고, 달동네 묵호 등대마을도 거닐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여행정보
두타산 천은사에서 쉰움산 오십정까지 2.5㎞ 거리로 1시간 40분쯤 걸린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일출 2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삼척에서 천은사 가는 버스가 하루 3회 운행한다. 바닷가 산책길은 해파랑길 33코스 중 한섬해변~묵호 구간이 걷기에 좋다. 묵호항 맛집으로는 싱싱한 회를 내는 ‘동북횟집’과 ‘진모래횟집’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