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부의 역할과 국가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역사적, 전통적, 문화적 측면에서 보아도 그렇다. 국민들이 이를 지지하건 지지하지 않건 내심 국가가 나서서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사실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저 신뢰사회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 정부에 대한 신뢰도 매우 약하지만 국민들간 상호신뢰는 더욱 약하다.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여전히 최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관계, 중소기업들 협동조합의 실질적 운영행태, 자영업자들의 상가조합 운영행태들을 보아도 그렇다. 이들은 스스로의 자율적 규율과 상호협력을 위한 역할보다 세금, 예산지원 등 정부기관들과의 관계에 주력하고 전직 관료들을 영입해 로비스트 역할을 맡기고 있다. 동대문상가에서도 옆 가게 새로운 디자인의 도용이 비일비재해도 이를 조합에서 스스로 규율을 세우지 못한다. 같은 시장이라고 불리지만 오랜 길드조직의 뿌리를 가지고 자율규제, 상호협력의 전통을 가진 서구의 시장문화와는 다른 것이다. 노동조합의 행태도 비슷하다. 유럽과 달리 산별노조의 협력에는 적극적이지 않고, 대기업 노조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격차는 어느 나라보다 크게 벌어져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저신뢰 사회
국가의 기능과 역할 여전히 중요
반면에 정부 역량은 점점 떨어져
국가지배구조개편 논의 일어나야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솔직히 직시하고 그 위에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설계하고 운영해 나가야 한다. 문제는 그래야 할 국가의 기능과 역량이 점점 떨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동력을 잃고 장기침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금과 같은 정치와 권력구조에서 국가리더십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국가정책을 끌어가기 어렵다. 장기적 효과보다 단기적으로 시선을 끌고 차별화하는데 더 집중하게 된다. 인재들의 흐름도 그렇다. 우수한 청년들은 의대와 법대에 가 안주하길 바라고, 경험을 쌓은 엘리트들은 유수 로펌들로 몰려들어 이들이 결국 대기업 고객들을 위한 쟁송과 정부기관 로비를 위한 한국최고의 인재집단으로 부상해있다. 반면에 정부와 공공부문은 점점 더 우수한 인재를 끌어오기 힘들어지고, 그 인재들의 충성도도 점점 약화되고 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한다고 본인과 가족의 삶, 장래가 보장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가 기울어져가는 길이다.
오늘날 세상의 추세는 다시 산업정책 시대로 돌아섰다. 중국 경제의 추격에 당황한 미국, 유럽이 모두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중국은 전략적, 장기적 산업정책에 의한 굴기를 지속하고 있다. 동맹도, 정의도, 가치도 없이 오로지 국익만 좇는 오늘날 세상에서 국가간 경쟁은 결국 국가지배구조와 정부의 능력간 경쟁이 되고 있다.
지난 해 이맘때쯤 한국은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다. 한 겨울 거리는 양쪽으로 분열된 시위대로 넘쳐났고,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지나 않을지 우려되었다. 많은 이들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우려했고, 정치와 국가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제언들이 쏟아졌다. 일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새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협상, 실용적 외교노선의 추구, 경기활성화 대책 등을 빠르게 추진해오며 정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함께 정치제도, 국가지배구조 등 미래한국에 대한 담론도 쑥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정치, 사회, 경제에 쌓인 문제들을 있게 한 어떤 요인들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비상계엄사태는 단순히 대통령 자리에 있던 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버릴 수만 없는 여러 얼굴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반년간 이어진 특검 활동은 관련된 인사들과 전 대통령 부부의 비리를 캐고 사법적 처리를 하는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이미 선진국이라고 자처한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제도적, 사회적 분석과 판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세월호 사태가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는데 집중하며 그 근본적, 구조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과 개선책은 흐지부지 외면되고 끝난 거와 같다. 비상계엄사태는 국가지도자로 양성되고 선출되는 과정, 국가권력구조, 정당제도와 운영행태, 정부의 역할과 역량 등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던졌다. 이에 제대로 접근해야 현 정권이 말하는 ‘내란극복’이 될 수 있다.
날로 험난해지는 세계정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국가발전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국가리더십, 권력구조, 정당 및 선거제도, 정부혁신 등의 관점에서 새해에 깊이 있는 논의가 다시 일어나게 되길 바란다. 정권 초기에 이러한 논의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충분히 긴 시간을 가지고 국민의 지성을 모아 깊이 있게 토의하고 모색해 나가야 할 이 시대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은 아직 진행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