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후 미국 달러당 원화 가치는 하루 전보다 7.8원 상승한 1469.7원에 거래를 마쳤다(환율은 하락). 전날보다 12.5원 오른 1465원에 개장한 뒤, 장 초반 한때 1457.5원까지 갔다. 간밤에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국내 외환시장을 겨냥해 이례적인 구두개입성 메시지를 내놓은 영향이다. 구두개입은 외환시장 흐름에 영향을 주기 위해 당국자가 내놓는 성명이나 공식적 발언을 뜻한다.
베센트 장관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최근 원화 평가절하는 한국의 견조한 경제 기초 여건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글을 올렸다. 미국 재무장관이 한국 외환시장에 공개적으로 개입한 건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다.
덕분에 14일 야간 시장에서 달러당 원화 가치는 10원 가까이 치솟았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구두개입과 정부 대책에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환율이 베센트 장관의 한마디에 반응한 것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베센트 장관에게) 별도의 요청을 한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시장에서는 한국 정부의 조치가 효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이 직접 ‘지원사격’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배경으로는 한국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계획이 꼽힌다.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원화가치 약세가 심화할 경우 연 최대 200억 달러 규모로 정한 대미 투자 금액의 조정을 미국에 요청할 수 있다. 한국의 대미 투자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에 원화 약세는 미국에도 부담이다.
그러나 베센트 장관의 구두개입 효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이날 달러당 원화 가치는 장중 한때 1470원대로 다시 내려앉으며 오전의 상승분을 반납하기도 했다.
오전에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1480원대 환율은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발언했고, 오후에는 최지영 재경부 국제경제관리관이 “현재 환율은 과열된 수요가 주도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시장에 통하지 않았다.
최지영 관리관은 “국민과 금융기관을 포함해 환율이 계속 절하될 것이라는 믿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이 다시 환율을 끌어올리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상 정부가 시장의 기대심리 관리에 실패했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실제 투자자들의 ‘달러 사재기’ 열풍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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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가도 금융위기 아니라는 한은 총재
이날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들은 올해 1~14일 미국 주식을 22억3900만 달러(약 3조3000억원) 순매수했다. 달러예금 잔액도 최근 일주일 새 1조원가량 늘었다.
정부는 이날 은행·증권사 등 금융사를 대상으로 한 거시건전성 조치를 추가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과거 은행 외화부채 부담금이나 선물환 포지션 한도 설정 등이 활용된 적이 있다. 금융사에 대한 조치는 수수료 인상 등으로 개인 거래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당장 외환시장을 안정시킬 만한 조치는 아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이를 두고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은 지난해 대부분 소진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가능성은 일축했다. 최 관리관은 “달러 공급은 충분해 당장 통화스와프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고 했다.
외환시장 불안의 ‘불똥’은 기준금리에도 튀었다. 이날 한은은 환율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연 2.5%로 동결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통화정책 방향 회의 후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중요한 결정 이유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는 지난해 5월 이후 8개월째 제자리다. 원화값 불안이 이어지면서 금리에 변화를 주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한은은 금리를 낮출 거라는 기대감에도 제동을 걸었다. 이날 공개된 통화정책 방향 결정문에서 ‘금리 인하’ 표현이 사라졌다. 지난해 11월 결정문에는 “향후 통화정책은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두되”란 문구가 있었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현재 금리가 중립금리(경기를 과열·위축시키지 않는 금리) 수준이라는 점에서 한은의 동결 기간은 과거보다 훨씬 길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금리 동결을 넘어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까지 이 총재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환율이 높아져서(원화값 하락) 물가에 영향을 주면 금리를 올려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금리로 환율을 잡으려면 0.25%포인트 인상으로는 안 되고, 2~3%포인트는 올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다.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 이 총재는 원화값이 1500원까지 하락하면 금융위기로 번질 수 있는다는 우려에 대해선 “한국은 대외채권국(외국에 줄 돈보다 받을 돈이 많은 나라)”이라며 “과거처럼 외화부채가 많은 상황이 아니라 금융위기라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외환시장을 바라보는 전문가의 시각은 어둡다. 향후 정부의 환율 통제력이 더 약화할 수 있다는 진단도 있다. 한국 정부가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위해 오는 7월부터 외환시장을 24시간 개방하고 역외 규제를 대폭 완화하기로 하면서, 오히려 외환시장 관리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니얼 모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 경제권은 시장 충격을 흡수할 체급이 되지만,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개방과 통제를 동시에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도 “지난해 4분기 이후 한·미 기준금리 격차가 크게 축소됐음에도 달러당 원화값은 오히려 급락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환율 방어를 위한 금리 인상은 실익이 없고, 금융 안정 차원에서도 근거는 미약하다”고 짚었다.
결국 단기적·즉발적 대응이 아니라 일관성을 갖춘 중장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 조언이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도 “달러 수요가 줄어들려면 한국에 투자할 유인이 있어야 하는데, 세금과 노동시장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다”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노력이 없다면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간 ‘공조 체계’의 중요성도 제기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외환당국의 컨트롤타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과 관련해 “기관 간 공조체계를 확립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