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지역에서 배터리 판매업을 하는 최모(50)씨는 지난해 9월 8일 오후 5시32분쯤 자신을 '박찬용 대위'라고 밝힌 이로부터 “부대에서 사용할 군용 랜턴 배터리 500개가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최씨는 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엔 군용 랜턴 배터리가 없다고 하자 박 대위는 “해당 물건이 S상사라는 업체에 있으니 이곳에서 물건을 받아 납품해 달라”고 안내했다. 이후 박 대위는 최씨에게 문자메시지로 공무원증과 주민등록증, 명함을 보냈다.
종종 군부대와 거래를 했던 최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S상사에 전화를 걸어 군용 랜턴 배터리를 주문하면서 1000만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돈을 입금한 뒤부터 박 대위, S상사와는 연락이 두절됐다.
이처럼 최씨에게 1000만원을 가로챈 '박찬용 대위'는 군인 사칭 노쇼(No-show) 사기 범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 것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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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인 진위여부 확인 창구' 신설
국방부 조사본부가 지난해 5~10월 국방헬프콜센터 내 ‘군인 진위여부 확인 창구’로 상담이 접수된 사례를 분석한 결과 총 1479건이 접수됐는데 이 중 222건(15%)이 '박찬용 대위'를 사칭한 노쇼 사기였다. 이어 정영훈 중사가 89건(6%), 김우정 중사 35건(2.4%), 김정환 중사 31건(2.1%), 김찬호 대위 30건(2%)으로 뒤를 이었다.
1479건의 상담 사례 중 실제 돈을 송금한 피해사례는 99건이나 됐다. 피해액은 72억4000만원에 달했다.
노쇼 사기의 경우 초기엔 음식점과 철물점 등 소상공인이 주요 대상이라 비교적 피해 금액이 적은 데다 수법도 단순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소방용품판매업, 컨테이너판매업, 금속가공업체, 냉동설비업체와 같이 대상이 다양해지고 금액도 커지는 등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1일에 자신을 국방부 군수과에 근무하는 '김우정 중위'라고 밝힌 이에게 질식소화포 450개 구매 요청받은 김모(건물위생관리업)씨의 경우 피해액이 9400만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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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범들 '포장지 효과' 활용한 것"
'박찬용 대위'나 '정영훈 중사' 같은 이름이 자주 사칭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제로 복무 중인 군인이면서, 이름에 거부감이 없고 군인 이미지와도 어울리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 명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칭한 건 여러 이름을 돌아가며 쓰는 것보다 나름의 경제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한다.
예컨대 범죄 조직들은 이른바 비대면 노쇼 사기 ‘시나리오’를 만들면서 실제 특정 부대에 근무하는 '박찬용'을 사칭할 이름으로 선정한다. 이후 군부대 공문을 구해 박찬용이란 이름을 넣어 가짜공문서와 신분증을 만든 뒤 사기 범죄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공신력이 뒷받침되는 군인ㆍ정치인 등을 사칭하고 공문을 보내 이를 믿게 만드는 이른바 ‘포장지 효과’를 사기범들이 활용한 것”이라며 “대리구매를 요구하면 거의 100% 노쇼 사기이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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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헬프콜센터 국번 없이 1303번
국방헬프콜센터 공태호 해군 소령은 “노쇼 사기범들이 실제 복무 중인 군인의 이름을 사칭하는 경우도 많다"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신분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경우, 해당 부대에 연락해 확인하거나 국방헬프콜센터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가짜 공문서에 적힌 부대 전화번호가 사기범들 전화번호인 경우도 있으므로 국방헬프콜센터를 활용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며 “노쇼와 전혀 관련이 없는 군인들이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아 군 내부적으로 피해도 막심하다”고 덧붙였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노쇼 사기 사건을 전담 수사한 강원경찰청과 협업을 통해 지난해 5월부터 군인 진위여부 확인 창구를 국방헬프콜센터 내에 신설했다.
24시간 운영되는 국방헬프콜센터는 누구나 국번 없이 1303번으로 전화해 상대방의 군 신분 여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민원인이 대리 입금 등을 요구한 군인의 이름과 계급, 소속부대, 전화번호 등의 정보를 제공하면 해당 인물이 실제 군인인지 확인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23일 국방헬프콜센터를 통해 주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치즈 케이크 3568개를 납품한 최인철(60)씨는 "만약 신분 확인이 안 됐다면 납품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요즘 노쇼 사기가 굉장히 많은데 정확하게 확인해주는 곳이 있어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었다. 다른 기관에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