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2021년작 소설 『헤르쉬트 07769』이 번역돼 나왔다. 노벨위원회는 "후기 작품들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프란츠 카프카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이르는 중부유럽의 어두운 부조리극과 희극적 풍자 전통에 뿌리를 둔, 존재론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글쓰기를 심화해왔다"며 그의 최신작 중 하나로 이 책을 언급했다.
제목은 주인공 플로리안 헤르쉬트의 성(姓)과 그가 사는 독일 튀링겐의 가상 마을 카나의 우편번호 07769의 합성어. 헤르쉬트는 청소 회사를 운영하는 '보스' 밑에서 일하는 청년으로, 시민대학에서 물리학 수업을 듣고 세상이 붕괴할 거란 우주론적 예측에 천착한다. 그 예측은 물리학 수업 강사 쾰러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할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짐에도, 헤르쉬트는 "최소한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야" 하는 일이라며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낸다.
연고가 없는 권력자에게 용기 있게 생각을 설파하는 헤르쉬트는, 정작 자신의 직속 상사 보스에겐 한마디도 벙긋하지 않고 복종한다. 독일어로 통치와 지배를 뜻하는 자신의 성 '헤르쉬트'와는 정반대의 삶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특징인 아이러니가 녹아있는 모습이다.
보스는 헤르쉬트에게 막말을 하며 허드렛일을 시키는 건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너는 항상 우주에만 관심을 그렇게 두는데, 왜 거기만 관심을 두느냐, 왜 바흐에 더 관심은 안 두느냐"며 바흐를 숭배하라고 강요한다. 바흐의 음악이 독일인의 정체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치 시대, 바흐 음악은 질서 있는 음악의 상징으로 국민을 결속시키기 위한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활용된 역사가 있다. 저자는 과거의 아이러니를 인물·서사·형식에 녹여 '독일적 질서'의 정신이 폭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어판으로 622쪽에 달하는 이 책에 찍힌 마침표는 단 하나다. 이 역시 끊어지지 않는 음악 속에서 반복과 변주로 긴장을 쌓아 올리다, 마지막에서야 해소되는 바흐의 푸가 구조를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