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우충원 기자] 에릭 텐 하흐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벤치가 아니라 보드룸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경질된 뒤 레버쿠젠에서도 짧은 시간 만에 흔들리며 커리어가 급격히 꺾였던 텐 하흐는 감독이 아닌 행정가의 옷을 입고 새 출발을 선택했다. 하지만 현장을 떠났다고 해서 입이 닫히진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유럽 축구계의 구조 자체를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
데일리 메일은 15일(이하 한국시간) “텐 하흐 감독이 최근 유럽 축구계 보드진 시스템을 저격했다. 냉혹해진 현대 축구계의 생리와 구단 수뇌부 내에서 득세하고 있는 기회주의적 인물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작심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텐 하흐가 “감독의 실패”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파장이 커졌다.
텐 하흐는 최근 네덜란드 트벤테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부임했다. 트벤테는 텐 하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팀이다. 선수 시절 몸담았던 곳이고, 코치로 지도자 커리어의 밑그림을 그렸던 클럽이다. 축구 인생의 출발점과도 같은 팀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취임 직후 목표를 분명히 했다. 텐 하흐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 재정비, 효율적인 1군 스쿼드 구성, 그리고 엘리트 스포츠 문화 정착에 대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사회 및 경영진과 협력하겠다. 트벤테의 기술적 토대를 강화해 지역 명문으로서의 잠재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밝혔다. 단순한 단기 성적이 아니라, 구단 구조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강조했다.
그러나 취임식에서 그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한층 더 강한 목소리를 냈다. 텐 하흐는 “나는 최근 내 방식을 증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해고통보를 받았다. 내 지도자 이력을 돌아보면 항상 꽤 좋은 성과를 내왔고, 내가 일해온 방식은 언제나 성공이었다”고 말했다. 단지 억울함이 아니라, 자신의 지도 방식이 실패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뉘앙스였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버쿠젠에서의 경험은 그를 더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경질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축구계 현실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사비 알론소를 보라. 그 역시 유럽 최고 수준의 전술적 역량을 갖춘 감독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당한 일을 겪고 있다. 이런 일은 이제 거의 모든 감독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감독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텐 하흐는 “축구를 모르는 구단주”와 “기회주의적 디렉터”라는 표현까지 꺼내며 수위를 높였다. 그는 “최근 축구계는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자신의 색깔이나 입김을 구단 운영에 남기고 싶어 하는 구단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의 논리보다 권력자의 욕망이 더 앞서는 시대가 됐다는 말이다.
이어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축구라는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테크니컬 디렉터들조차 팀의 성적이 조금만 나빠지면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당장의 여론 무마를 위한 기회주의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꼬집었다. 감독과 선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조직이 방향을 잃었다는 의미다.
데일리 메일은 이러한 텐 하흐의 주장에 힘을 싣는 사례들을 함께 언급했다. “올해 초 엔조 마레스카가 첼시를 떠난 사건은 구단주와 스포츠 디렉터의 과도한 영향력 확장에 대해 현장 감독들이 느끼는 우려와 회의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짚었다. 또 “알론소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경질된 것, 그리고 맨유가 텐 하흐 후임으로 야심 차게 선임했던 후벵 아모림을 시스템 변경 요구 불응 등의 이유로 단기간에 경질한 것 역시 텐 하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텐 하흐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던 감독 중 하나였다. 아약스를 이끌던 시절 그는 단순히 우승을 만든 것이 아니라, 팀을 현대 축구의 모델처럼 구축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에레디비시 우승을 포함해 5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2018-2019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4강 신화를 쓰며 이름값을 올렸다.
이 성과를 발판으로 텐 하흐는 2022-2023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았다. 명가 재건이라는 과제를 안고 프리미어리그 무대로 들어갔다. 첫 시즌은 성과가 있었다.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고 챔피언스리그 티켓도 확보하며 팀의 방향성을 되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영입 선수들의 부진, 전술의 단조로움, 선수단 장악 실패 논란이 겹치며 비판은 점점 거세졌다.
시즌 막판 FA컵 우승으로 기사회생하며 세 번째 시즌을 시작했지만, 결국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다. 2024년 10월 텐 하흐는 전격 경질되며 맨유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더 충격적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사비 알론소의 뒤를 이어 레버쿠젠 감독으로 부임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단 3경기 만에 1승 1무 1패라는 성적을 남기고 경질됐다. 지도자 커리어에서도 가장 짧고 가장 뼈아픈 실패 중 하나였다.
그런 텐 하흐가 이제는 감독이 아닌 디렉터로 돌아왔다. 그는 당장 벤치 복귀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을 닫지도 않았다. 텐 하흐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축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세계다. 지금은 트벤테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가는 데 집중하고 싶다.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지켜볼 일”이라고 밝혔다.
감독직에서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 다시 축구계 중심부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전술판이 아니라 시스템을 겨누고 있다. 텐 하흐가 던진 날 선 메시지가 단순한 불만으로 끝날지, 아니면 유럽 축구계가 외면하던 현실을 드러내는 경고가 될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