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전쟁 뒤, 중국을 떠나던 어머니의 기억 [왕겅우 회고록 (37)]

중앙일보

2026.01.16 13:00 2026.01.16 13:4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중국을 떠나던 어머니의 기억 My Mother Back in Ipoh


[역주: 저자는 모친이 자신을 위해 적어준 기록을 몇 차례 회고록에 삽입했다. 모친의 기록은 이 연재에 싣지 않았으나 1947-48년의 상황 기록은 저자의 회고 내용에 참고가 되는 점이 많으므로 여기 싣는다.]

우리 조국의 승전 후 우리 동포들은 언제 만나든 기쁨에 넘쳐서 귀국할 계획을 이야기했다. 벌써 여러 집이 귀국 준비를 하거나 출발을 앞두고 있었고 아무도 남쪽으로 다시 올 계획이 없었다. 우리는 네 졸업시험 결과를 받을 때까지 계획을 미루고 있었지만 필요한 준비를 벌써 시작하고 있었다.

1947년 3월에 네 시험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중국에 돌아가 대학에 다니도록 결정했다. 네 아버지는 늘 남양을 빨리 떠나고 싶으면서도 국내의 혼란과 경제적 문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불행을 느끼시던 그분은 이제 아주 돌아갈 때가 왔다고 생각하셨다. 일단 휴직을 해놓았다가 나중에 사직하실 방침이었다. 난징 계신 네 넷째 종조부님이 학교 자리를 잡아주셨다. 전쟁이 막 끝나 아직 배편이 적어서 우리는 6월 선표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배가 아주 크고 바다가 잔잔해 멀미가 없었다. 순탄한 항해 닷새 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디. 네 아버지와 네가 난징에 다녀온 뒤 나를 데리고 네 할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러 타이저우로 떠났다. 그 연세에 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시고도 아주 정정하셔서 무척 기뻤다. 집 떠난 지 11년 만에 그분을 다시 뵙고 집안이 모두 무사평안한 것을 보면서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잠깐 쉬고 나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나섰다. 시골에는 아직 게릴라 활동이 있어서 성묘와 제사 올리러 문중 사당에는 갈 수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주일 후 네 할아버님 74세 생신 잔치를 차려 친척들을 청했다. 모두 경하드리며 만복과 장수를 기원하니 흡족한 기색이셨다.

생신 잔치 후에 네가 국립중앙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도록 네 아버지가 난징으로 데려가셨다. 응시자가 많아서 경쟁이 치열했다. 2만 명 지원자 중에 겨우 450명을 뽑았으니. 다행히 너는 60등으로 들어가 수업료와 생활비를 면제받았다. 면제받은 돈이 큰 액수는 아니라도 따라오는 격려가 컸다. 네 아버지는 볼일이 더 있어서 네가 먼저 돌아왔다.

시골에는 게릴라 활동이 있었으나 시내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동타이는 달랐다. 신4군이 점령하고 세금과 공출을 거뒀다. 우리 집에 재산이 좀 있어서 온 집안이 지낼 만했는데 8년의 전쟁을 겪은 끝에 신4군이 들어오자 빈민의 우호적 태도를 얻기 위해 집안의 토지를 나눠줬다. 집안사람들은 그러고도 안전을 느낄 수 없었다. 박해가 두려워 그곳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집 없는 신세로 친척들 틈에 묻어 살았다.

그래서 나는 오빠와 누이를 만나 여러 해 쌓인 회포를 풀 길이 없었다. 우리는 중국에 8개월간 있었으나 내 형제를 만날 기회는 몇 번 안 됐고 함께 보낸 시간이 아주 적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속에 슬픈 응어리로 남아있는 일이다. 당시에는 그들이 매우 어려운 형편임을 알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다. 네 아버지 월급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던 월동 준비를 위해 우리가 갖고 있던 돈은 필요했으니까. 당시 너나없이 처해 있던 곤경은 필설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9월 중순 개학을 앞두고 우리는 할아버님께 작별을 고한 뒤 난징으로 향했다. 교사 사택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먼저 네 아주머니를(어머니의 올케) 보러 양저우의 장 씨 댁으로 갔다. 이튿날 네 아버지는 너를 데리고 난징으로 먼저 가시고 나는 양저우에 남아 3주간 더 지냈다. 사택 준비가 끝난 뒤에 네가 나를 데리러 왔다.

새로 지은 사택은 무슨 수용소처럼 썰렁해서 겨울이 오기 전부터 냉기가 느껴졌다. 초가지붕에 흙바닥이었다. 조금 큰 방이 둘인데, 뒤쪽 방은 창문이 작아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텅 빈 방에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있었다. 이튿날 가게에 가서 간단한 물건 몇 가지를 사 왔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좀 불편해서 한 달 후부터 집에서 해 먹기로 했다. 학교 식당 음식으로 배가 덜 차는 느낌은 기름을 너무 적게 쓰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매끼 한두 가지 음식만 해도 제대로 먹은 것 같았다. 두 달쯤 지나면서 살림이 차츰 자리 잡혔다. 너는 매주 한 차례 왔고, 아무거나 있는 대로 같이 먹자고 친구들을 데려올 때도 있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졌다. 몸이 튼튼하지 못한 네 아버지는 추위를 무서워했다. 버티고 계시기는 해도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오래 기다려 온 그분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각오로 말라야 정부에 사직서를 보냈다. 우 선생, 류 선생 같은 친구들이 사직을 말리며 말라야에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네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그분들 권유에 따라 남쪽으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다.

네 아버지는 한 학기만 가르친 후 말라야에 돌아가기 위해 사직했다. 할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고향으로 가야 했지만 출발이 너무 급했다. 이제 날씨가 추워져 있었고, 여건이 아주 좋지 않아서 고향에 서둘러 갔다가 서둘러 나오는 것이 할아버님의 걱정만 더해드릴 것 같았다. 우리는 왜 갑자기 떠나야 하게 되었고 왜 떠나기 전에 찾아뵙지 못하는지 설명드리고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준비가 끝난 후 우리는 2월 말에 난징을 떠나 배를 기다리러 상하이로 갔다. 출항 전날 밤 우리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다. 나라는 어지럽고 집안은 어려운데 늙으신 아버님과 어린 아들, 치열한 내전과 불확실한 취업 전망 앞에 네 아버지는 떠나는 길밖에 없다고 결정을 내리셨다. 네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움직인다면 어디로든 따라가야 한다고 하셨지만, 그 말씀을 하시는 그분 마음속의 괴로움은 네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객선이 줄어들어서 싱가포르로 바로 가는 배를 탈 수 없었다. 우리는 홍콩 가는 배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 갈아타게 되었다. 홍콩에서 갈아탈 배를 기다리며 중급 호텔에서 묵었다. 우리 배가 언제 떠날지 불확실해서 홍콩 시내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광저우를 구경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출항까지 3주일이나 기다려야 할 줄은 몰랐다. 배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낡은 배인데 운임은 비쌌다. 그러나 운항하는 배가 적었기 때문에 그 배를 놓칠 수는 없어서 그냥 기다렸다가 탔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배가 그렇게 모자라서 승객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현지 중화서국 지배인 쉬차이밍(徐采明) 씨 부부가 우리를 마중하고 만찬에 초대했다. 쉬 선생은 너를 두고 왔다는 말을 듣자 흥분해서 당장 전보를 쳐서 불러오라는 것이었다. 옆에서 부인이 설명하기를, 이분은 너무 소심해서 여섯 아이 중 하나도 해외 유학을 안 시키고 모두 촌놈을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위험한 시기에 너를 남겨두고 온 것이었고, 너는 반년밖에 더 있지 못했다.

그날 밤차로 싱가포르를 떠나 아침결에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우 선생 내외가 마중나왔고, 그 댁에서 아흐레를 지낸 후 이포로 돌아와 옛 친구 몇을 만났다. 떠난 지 거의 10개월 만에 다시 만나 기뻤다. 우리는 임시로 브루스터 가에 있는 저우 부인의 옛집에서 지냈는데, 저우 부인의 조카가 쓰고 있었다. 거기 지내면서 우리는 호조(互助) 정신에 따라 집세와 생활비를 거들었는데, 좁고 시끄러워서 지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저우 부인의 조카는 무슨 화학약품을 실험하고 있었는데 지독한 냄새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다. 네 아버지가 퇴근하면 편안하게 쉴 자리가 없어서 매일 저녁식사 후 로엑칭 로의 산쟝공회까지 걸어가 자정 무렵까지 쉬다가 돌아왔다. 반년간 그렇게 지냈다.

너는 중국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었고, 특히 중국어가 늘고 있었다. 그곳에 몇 해 더 있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공부와 학교의 다른 일들에 관해 편지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학생들이 주방 직원들의 식품구매를 믿지 못해서 당번을 정해 감독을 맡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가가 급하게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월초의 가격과 월말의 가격이 크게 다르고 변화를 예측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네가 당번으로 뽑힐 때 너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방학 기간도 맡아야 했다. 그 기간에는 시외의 학생들이 찾아와 숙식을 필요로 하는데, 갑자기 5백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지. 네가 그 일을 해내고 배척 운동의 표적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이가 어려도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는 자세와 함께 조직 능력도 가진 것 같다. 그 소식 듣고 기쁜 마음으로 적어두었다. 우리는 해외에 살면서도 국내의 내전 상황이 걱정스러워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말라야에서는 게릴라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불태우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뉴스가 하루도끊이지 않았다. 페락 주 형편이 특히 험악해서 네 아버지가 시찰 나가실 때마다 안전 문제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의 관계가 나빠져서 조그만 사단이라도 있으면 크게 터질 위험이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 이포에 영사관을 열고 회교도 외교관 이브라힘 마톈잉(馬天英) 씨를 영사로 보낸 것은 두 민족 사이의 감정을 완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의 마 씨는 대화도 매력적이고 재미있었다. 그 부인은 현모양처의 전형이라 할 만큼 점잖고 현숙한 사람이어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1948년 10월 중국의 내전 상황이 심각해졌다. 쉬저우 함락 때 우리는 국민당의 패세를 확인했다. 난민들의 곤경과 혼란스러운 상황을 신문에서 읽을 때마다 우리 마음이 어두워졌다. 네게 돌아오라고 거듭해서 편지를 썼지만 피난민이 너무 많아서 선표를 사주기가 힘들었다. 11월 말에야 네가 우 선생의 맏아들 티셴과 함께 말라야로 돌아올 선표를 살 수 있었다.

싱가포르의 대학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너는 모교인 앤더슨학교에서 자리를 찾았고, 본과 5학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월급은 150달러였다. 너는 중국어 과목 만들 것을 교장에게 건의하고 본과 8학년과 9학년을 추가 봉급 없이 가르치겠다고 자원했다. 그 위에 오후에 성 미카엘 학원에서 중국어 가르치는 일이 있어서 네 일이 참 많았다.

두 학교에서 네가 받는 급여를 합치면 210달러였다. 매달 25달러를 용돈으로 빼내고는 나머지를 대학 학비로 쓰기 위해 은행에 저축했다. 그밖에 매달 몇 달러씩 우편저금 계좌에 넣었다. 그 계좌에 몇십 달러를 모아 놓았었는데 통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우체국 좋은 일만 하고 말았다. 7월 말까지 가르친 다음에는 싱가포르에 입학시험 치르러 갈 준비를 했다. 다행히 합격해서 10월 초에는 대학생이 되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