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에서 한남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큰길에서 한두 걸음을 벗어나자 작은 간판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간판을 내건 상점 대부분은 반지하나 1층에 자리한 10평 남짓한 편집숍이었다. 매장 안에는 20~30대 방문객 서너 명이 진열대 앞에 서서 소품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가볍게 집어 들어 살폈다. 평일 오후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잠시 머물다 자연스럽게 결제로 이어지는 모습이 반복됐다.
이태원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한동안 침체를 겪었던 이태원은 인파를 끌어모으기보다, 골목마다 잠시 들러볼 만한 공간과 여유를 채우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강진역에서 시작해 이태원관광특구 일대를 걷다보면 소형 소품샵과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2022년 참사 이전 이태원이 다채로운 음식과 유흥의 중심지였다면 현재는 이태원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 중이다. 사건의 트라우마는 공간 자체를 바꾸고 있다. 방향성은 분명한 취향과 명확한 콘셉트다. 밤 중심의 소비에서 벗어나 낮 시간대에 걷고 머무는 방문객을 겨냥한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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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점을 잇는 독특한 이동
이태원 소품샵 상권의 흥미로운 점은 매장들이 한곳에 밀집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나타나는 반지하나 1층의 작은 가게들이 띄엄띄엄 모습을 드러낸다. 성수동이나 홍대 인근처럼 밀집한 상권을 형성하기보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입소문 난 매장들이 골목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구조다.
방문객들은 흩어진 상점을 찾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켠다. 인스타그램에서 화제가 된 특정 작가의 오브제를 보거나, 국내에서 보기 힘든 해외 빈티지 소품을 구경하기 위해 목적지를 찍고 이동한다. 이태원 소품샵 투어는 한 구역을 통째로 훑는 방식이 아니라, 점과 점을 잇는 이동에 가깝다. 그만큼 공간과 가까워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난다. 유명 상점을 향해 걷다 보면 그 옆 골목이나 계단 아래 숨어 있던 이름 모를 가게들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 자체가 하나의 동선이 되고, 그 위에 놓인 작은 편집숍들이 추가적인 유입 효과를 얻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소품샵은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식사와 커피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으면서 설득력 있는 동선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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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들어가게 되는 가게들
이태원 소품샵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은 ‘작고 가볍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방을 꾸미는 ‘백꾸’ 열풍의 주역인 인형 키링부터 엽서, 오브제처럼 1~3만 원대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주를 이룬다. 구경하다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도록 심리적 문턱을 낮춘 게 요즘 소비 트렌드다. 좁은 공간에서 높은 효율을 내야 하는 골목 가게의 현실적인 조건과 잘 맞물린다.
이태원에서 소품샵을 운영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부담 없는 크기와 가격대의 소품들이 골목 가게의 물리적 특성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입을 모은다. 진열대 앞에서 소품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가볍게 촬영해 SNS에 공유하는 방문객도 적지 않다. 소품샵이 ‘머무는 공간’인 동시에 ‘가볍게 소비되고 기록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방문객들 역시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의외성을 이태원이 가진 매력으로 꼽는다. 평소 뜨개질이 취미라는 직장인 김지윤(29)씨는 지난 8일 연차를 내고 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김씨는 “원래 가려던 유명 카페가 있었는데, 이동하는 골목 안쪽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제 뜨개 소품샵에 마음을 뺏겨 한참을 구경했다”며 “쇼핑하러 왔다기보다 산책하면서 취향에 맞는 물건을 발견하는 느낌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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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로 확인되는 이태원의 ‘조용한 귀환’
이태원의 회복은 과거의 북적임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골목 단위의 취향과 체류를 중심으로 보다 내실 있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상권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이태원관광특구 일대의 유동 인구는 참사 이후 감소세를 딛고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과 소비가 동시에 늘어나면서 과거 이태원의 장점으로 꼽히던 다국적 소비 구조도 점차 되살아나는 모습이다. 한국부동산원의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조사에서도 공실률이 개선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조사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이태원 지역의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3.9%로 2024년 대비 10%포인트 하락했다. 소품샵을 비롯한 소규모 브랜드의 유입이 상권 회복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용산구는 2023년 서울시 공모사업으로 선정된 ‘이태원 로컬브랜드 상권강화사업’을 통해 이태원의 정체성을 반영한 상권 브랜드(BI) ‘모두를 환영하는 이태원(Welcome All Itaewon)’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퀴논길과 녹사평광장 일대에서 공연과 팝업스토어,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국내 방문객은 2024년 125만 명에서 지난해 1~11월 130만 명으로, 외국인 관광객은 같은 기간 24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늘었다. 내·외국인 방문객은 2025년 한해 155만 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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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옮겨간 상권의 무게중심
이태원 골목은 소품샵이 살아남을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춘 동네라는 평가다. 대형 매장만큼 과도한 회전율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낮 시간대 체류와 맞물린 소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눈에 띄되 소란스럽지 않은, 이른바 ‘조용한 소품 가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이태원 소품샵 증가를 일시적인 유행으로 보지 않는다. 인접 지역의 인기 확산과 상권 구조 변화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김영갑 KYG상권분석연구원 교수는 “한남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라이프스타일 소비가 인근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번지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월세 부담이 낮은 이태원 골목 안쪽이 실험적인 소규모 매장들이 들어오기 좋은 환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대로변 중심 상권이 약화하면서 이면도로가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고, 소품샵은 이런 변화에 가장 잘 맞는 업종”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