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나는 2학년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돌아갔다. 친구들과 기숙사에 모여 정상적으로 강의에 출석했다. 모두 조심스러웠다. 북방에서 진행 중인 전투를 아무도 언급하지 않아도, 형편이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몇 달 동안 부모님 편지에는 경제와 전쟁에 관한 걱정이 담겨 있었지만 정부군이 다른 지역들은 잘 지키리라는 희망을 갖고 계셨다. 현실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11월 초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격파되고 베이징 공격이 시작되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난징에서 불과 1백 마일 북쪽의 요충지 쉬저우(徐州)의 공격이었다. 이 시점에서 대학 당국은 모든 학생을 귀가시켰다.
학생 중 집이 먼 사람들은 학교에 남았다. 말라야 출신으로 나와 같이 입학한 쾅유창(鄺譽昌)은 수학과 학생이었다. 잘 모르던 사이였는데 이제 매일 보게 되었다. 서부와 남부의 먼 지방 출신 학생들도 수십 명 남아있었다. 얼마 있으면 학교가 다시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쾅유창과 나는 말라야에서 온 신입생 둘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압둘 마지드와 라자 농 칙은 중국 정부 장학금으로 온 말레이 학생들이었다. 마지드는 귀국 후 말라야 정부의 정보 부서에서 일했고, 라자 농 칙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 쾅유창은 돌아오지 말고 공부를 마치라는 부친의 분부에 따라 떠나지 않았다. 수십 년 후 홍콩에서 그를 만났을 때,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유학생의 귀국을 막는 말레이시아의 정책 때문에 페낭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말라야로 돌아오라고 하실 때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쾅유창처럼 대학에서 숙식을 보장하는 한 학교에 남아있다가 전쟁의 결과를 닥치는 대로 받아들일 마음이었는데, 부모님은 난징이 최후의 결전장이 될 것을 걱정하며 재촉 편지를 거듭거듭 보내셨다. 예상되는 위험을 피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외아들 된 도리가 아니라고 상하이 숙부님을 통해 몰아세우셨다. 숙부님이 단호한 태도로 12월 초의 선표까지 끊어주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응낙했다. 내가 버티던 까닭이 한 번 떠나면 중국에서 다시 살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종종 되돌아보게 된 일이다.
이포에서 부모님이 그때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인 상하이의 저우 씨 댁을 찾아갔다. 그 집은 1947년 우리와 비슷한 무렵에 중국에 돌아왔었는데, 그 집도 말라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집 사촌인 우 선생 댁의 티셴 형님도 친척들 만나고 사업을 알아보려고 상하이에 왔다가 나랑 같은 배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그 형님과 동행하는 덕분에 도망꾼의 자격지심을 덜 느끼게 되었다.
우리 배는 킬룽(타이완)과 샤먼에 들르고 홍콩에 좀 길게 머물렀다. 덕분에 중국을 떠나는 길에 다른 곳들을 조금 구경할 수 있었다. 킬룽에서는 당일치기로 타이베이에 가서 질서 있고 평온한 모습을 보았다. 그곳이 1947년 초의 난폭한 민중 탄압 이후 삼엄한 계엄 상황이었다는 사실도, 국민당정부가 대륙 상실에 대비해 그곳에 피난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샤먼에서는 필리핀과 말레이열도의 화교를 상대로 한 교역으로 흥청대던 항구가 기억난다. 모든 것이 아주 정상으로 보였다.
홍콩은 그와 달리 조금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지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옮겨오는 사업가들이 많고, 그중에는 홍콩에도 예비용 집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했다. 상하이의 아버지 사촌 쉬보쟈오(徐伯郊)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고, 배가 사흘 밤 홍콩에 정박하는 동안 우리는 그 집에서 묵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 도시의 활기찬 길거리를 돌아다녀 보았고, 영국인이 버티고 있을 경우 그 도시가 내전을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화물칸 승객이어서 절인 생선과 채소의 짐 틈에서 지냈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갑판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갑판 위의 맑은 공기 속에서 떠나온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생각했다. 정부가 무너지고 중국이 공산당 지배를 받게 될 전망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기억이 난다. 지도자들이 부패한 정권은 통치 능력을 상실했고, 다른 종류 지도자들을 만나는 편이 중국을 위해 낫겠다는 생각을 나도 대다수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국민당이 대륙 포기 후 타이완에서 재기할 능력과 행운과 의지를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그 성공을 발판으로 그곳 사람들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기에 이를 것은 더더욱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 국가로서 중국의 장래에 대해 나는 걱정하지 않았고, 통일만 이룬다면 그 위대함을 되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걱정한 것은 말라야에서 내 할 일, 대학 공부를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과의 재회에 생각을 집중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부모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상하이 숙부님 말씀이 옳았다. 중국의 운명에 나보다 더 큰 슬픔을 느끼고 사랑하는 중국이 전면적 전쟁으로 파괴될 것을 걱정하는 분들이니까.
배가 싱가포르에 가까워지면서 이포와 그곳에서 내 장래에 관한 생각이 더 많이 마음에 떠올랐다. 새로 만들어진 말라야연방 사정을 잘 살펴보지 않고 있었다. 말라야공산당과의 전쟁인 “긴급사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난징에서 듣는 말라야 소식은 부모님 편지를 통한 것뿐이었다. 공산당이 활동하는 시골 지역 학교를 아버지가 시찰하실 때도 있지만 위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도 있었다.
서방의 대학에 나를 보내실 형편은 못 되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싱가포르에 있는 두 대학을 생각했다. 명성 있는 의과대학과 중등 교원을 양성하는 래플스대학이었다. 앤더슨학교 졸업반 때 선생님 두 분(또는 그 이상)이 래플스 출신이었다. 그 학교를 다니고 교사직으로 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포에서 부모님을 다시 뵙는 내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이 엇갈렸다. 연말을 1주일 앞둔 때였고, 헤어진 지 9개월 만이었다. 1년 반 전에 확고한 마음으로 떠났던 이곳 이포에 이렇게 돌아오게 될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국에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부모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실 수 있었을까?
플라스틱 성형공장 위층의 작은 방 두 개를 쓰고 계시다가 내 도착 얼마 후 개인주택의 방 두 개를 빌려 이사했다. 사택을 배당받지 못한 것이 이상했는데, 페락 주의 주택 사정이 심각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페락 주는 말라야인민해방군과의 전쟁 중심지였다. 전후 경제의 회복이 늦은 곳이었고, 공무원 사택을 짓는 것도 벅찬 형편이었다.
뉴타운의 낯익은 거리를 거닐며 1947년 중엽에 떠난 후의 많은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늘어난 위기감과 긴장감은 내게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난징에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새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여러 개 말레이국가와 거대한 이민집단들을 합쳐 세워질 새 국가의 장래를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라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이 현실을 체념하고 그저 내가 곁에 있어서 변화하는 상황에 함께 대응할 수 있기만을 바라시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와 마음이 놓이시는 것 같았고, 그분들께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라날 때와 가까운 환경으로 돌아오면서 묘하게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이포의 생활 조건은 3년 반 일본군 점령기보다 훨씬 좋았다. 새 말라야에서 내가 살기 바란다는 생각을 부모님이 평온한 마음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를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장래의 공부에 뒷받침이 될 일자리를 찾았다. 앤더슨학교 교장이 말레이 특수반에 영어 가르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대학 맛까지 본 졸업생을 쓸 수 있어서 좋아했다. 말레이 소학교 졸업생 중 영어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을 받아 영어를 보강해 주는 특수반이었다.
영어를 가르쳐본 일이 없었지만, 내 선생님들이 가르치던 방식을 기억해내 응용해 보았다. 단어 게임을 통해 학생들이 말하기와 쓰기를 얼마나 빨리 배웠는지 기억난다. 나로서도 가르치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고 배우는 데 열성인 두 반 말레이 학생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다른 반 수업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졸업시험에 중국어를 선택한 상급반 학생들의 중국어 수업은 자원해서 맡았다.
그에 더해 성 미카엘 학원에서 초급중국어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를 오후에 맡았다. 구시가의 가톨릭 학교인데, 대다수를 점하는 중국계 학부모들이 중국어도 좀 가르쳐달라고 학교에 요청한 것이다. 교사 구하기가 워낙 힘들어 니는 자격증이 없어도 중국 대학을 다녀본 사람이라서 채용될 수 있었다. 이 일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아는 두 개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이제 내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하게 된 도시에서의 생활로 나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
바쁘게 지내면서 장래의 학자금을 꽤 모아놓을 만큼 수입도 있었다. 그럴 때 영국 정부에서 식민지 고등교육의 발전계획 작성을 위해 알렉산더 카-손더스 경이 이끄는 전문가 시찰단을 파견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싱가포르의 두 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옛 급우들이 돌아와 두 대학(college)을 합쳐 대학교(university)를 만들 방안에 대한 공공 토론에 참여했다. 그 토론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내 진로를 찾을 가능성에 마음이 들떴다. 중앙대학과는 다른 종류의 대학을 향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급우 대부분은 의과대학에 다녔지만, 나는 그 방향으로 자격도 없고 흥미도 없었다.
카-손더스 시찰단은 예상대로 말라야대학 창설을 제안했다. 래플스대학이 그 문리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문과에 지원했고, 졸업시험 성적이 좋았던 후배들과 함께 합격했다. 대학에 다녀봤다는 사실이 합격에 도움이 되었다. 부모님은 마음을 놓았고, 장학금을 못 받거나 저축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결국 나는 수업료 전액을 면제해주고 기숙사비 일부를 보조해주는 장학금을 받았다.
이 학교가 어떤 학교가 될지 내가 알던 중국의 학교와 비교하며 새 학교에 합격된 7월부터 생각을 시작했다. 국가 건설의 과업을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장래 말라야 국가의 수요를 교과과정에 반영한다는 방침이 나와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영국의 정치이념에 따라 이 식민지국가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영국인들이 바란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복잡한 복합사회가 되어 버린 말라야에서 그런 목적을 위해 학생들이 과연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 자신은 그저 내 공부를 마치고 현대세계에 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랐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