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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시선] “내 퇴직연금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중앙일보

2026.01.1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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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 논설위원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평생 일한 대가로 적립한 개인의 사적 재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금화는 개인의 운용 권한을 제한하고, 운용 실패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중략)… 절대로 개인의 자산을 국가가 관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연금도 못 받을 수 있어서 걱정하는 2030들한테 퇴직연금까지 국가에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게시판에 이런 내용의 ‘퇴직연금 기금화 추진 반대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다. 기금화 추진 중단과 근로자 동의 없는 일괄 기금화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금 과장하면 '내 퇴직연금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7일 “이달 중 실무 당정과 고위 당정을 거쳐 (기금화의) 구체적인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며 속도전을 예고한 데 따른 것이다. 지난 18일 현재 3859명이 동의했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개별 금융사가 운용하던 퇴직연금을 하나의 큰 기금으로 모아 특정 기구가 일괄 운용하는 것이다. 2005년 퇴직연금제도 도입 이후 대규모 사업장 위주로 회사(확정급여(DB)형)나 근로자 개인(확정기여(DC)형)이 개별 금융사와 계약을 맺고 상품을 선택해 운용하고 있다. ‘계약형’ 방식이다. 중소·영세 기업은 여전히 퇴직금 제도에 머물러 있다.

정부와 여당이 내세우는 퇴직연금 기금화 명분은 이렇다. 우선 퇴직연금 사각지대 해소다. 퇴직금 제도 운영 사업장을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퇴직연금 의무화를 추진하며 기금화하겠다는 것이다. 기존 퇴직연금의 경우의 명분은 수익률 제고다. 대부분(82.6%)이 원금보장형 상품에 묶인 탓에 최근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2.86%에 불과하다. 기금화를 통한 ‘규모의 경제’로 수익률을 끌어올리겠다는 주장이다.

명분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당정은 국민연금과 국내 첫 기금형 퇴직연금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의 수익률을 앞세워 장밋빛 전망만을 늘어놓지만, 기금화로 몸집을 불리면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건 지나친 일반화이자 단순 논리다. 오히려 후불적 임금인 퇴직금을 기금으로 묶게 되면 개인의 투자 선택권 제약과 재산권 침해 등 논란의 여지가 상당하다.
퇴직연금 기금화 속도 내는 여권
규모의 경제로 수익률 제고 추구
정부의 또 다른 쌈짓돈 만들 수도
보다 본질적 문제는 운용 실패로 인한 투자 손실이 발생했을 때다. 피해는 고스란히 근로자의 몫이다. 투자 선택권 없이 손실만 오롯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수탁자가 2000억엔 규모의 퇴직연금을 부실 운용하고 손실을 은폐해 근로자 88만명의 퇴직금을 날린 일본의 ‘AIJ 사태’가 대표적이다. 투자 결정 주체(기금)와 수익자가 다른 탓에 운용 실패에 따른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 다툼의 소지도 많다.

무엇보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국민연금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퇴직연금이 환율 방어와 증시 부양을 위해 정부가 쌈짓돈처럼 쓰고 있는 국민연금의 또 다른 버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기금화 반대 청원에서 청원인은 “퇴직연금 운용을 하나의 기금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정치적·정책적 개입 위험을 높이고, 한 번의 판단 오류가 수많은 국민의 노후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코스피 5000시대를 천명하는 정부는 국민연금에 지원군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 확대 검토를 지시했다. 외환 당국은 지난 연말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국민연금까지 동원해 환율을 끌어내렸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환율이 다시 급등하며 국민연금은 헛돈만 태운 셈이 됐다. 청원인이 지적한 대로다.

퇴직연금 기금화를 추진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은 각종 의심을 부추긴다. 국내 주식 투자를 늘리는 국민연금이 연금 지급을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할 때 쏟아질 매물 폭탄을 받아낼 안전장치가 퇴직연금 기금화라는 것이다. 지난해 말 431조7000억원인 퇴직연금 적립금은 2040년에는 1172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자본시장연구원)된다. 심지어 늘어나는 적자 국채 발행을 메우려 기금화를 통해 퇴직연금을 채권시장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란 시각까지 있을 정도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런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퇴직연금 기금화의 필요성과 문제를 아우르는 솔직하고 치열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공론과 논쟁 없이 속도만 낸다면 퇴직연금 기금화를 둘러싼 의심과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아무리 노후 자금 관리가 명분이라 하더라도 국가가 국민연금에 이어 퇴직연금까지 손댈 수 있는 권한은 없다.



하현옥([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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