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라(奈良)현에서 지난 13일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의 정상회담은 지난해 10월 30일 경주 회담에 이은 두 번째다. 두 달여 만에 양자 방문이 완성된 것이다.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을 통해 조세이(長生) 탄광 수몰 피해자 신원 확인 협력에 합의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진전시켰다. 이에 맞춰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는 지난 15일 ‘한·일 정상회담 평가’를 주제로 한일비전포럼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이번 회담이 ‘진보 한국 정부’와 ‘보수 일본 정부’라는 이념적 격차를 넘어선 실용적 결실을 거뒀다”는 데 뜻을 모았다.
공통분모 된 중국의 거대 경제 위협
경제협력 위해 역사 문제 해결 필수
독·프도 불가역적 합의로 과거 극복
정권 바뀌어도 이행할 기반 닦아야
법적 책임 넘어 인도적 협력 첫발 뗀 과거사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이번 회담은 특히 과거사 이슈인 ‘조세이 탄광’ 문제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제일 먼저 유해 수습과 봉환에 대한 대응을 약속한 게 성과였다. 일본 측 발표문에서 ‘한·일 간 조정의 진전을 환영한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기존의 법적 책임 차원의 사죄가 아니라 인도적 협력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 외교란 결국 투트랙 외교이고, 과거사란 점에서 입장차가 있어도 그게 미래 협력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것 아니겠나.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한·일 관계가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이 있는 것이고, 그런 판단과 함께 과거사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일본이 수용할 수 있는 ‘인도적 협력’ 논리를 대안으로 제공했다고 본다.
현재 기금 부족으로 중단된 제3자 변제에 대해서도 일본 측의 성의, 특히 재계의 기부가 절실한데, 이번 회담은 일본 정부가 자국 내 기업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포석이 됐다. 또 우리가 일본과 고차원적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의미를 다졌다는 게 이번 회담의 가장 큰 포인트다. 이 대통령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의사를 공식화했다는 점도 후쿠시마산 식료품 수입 문제에 대한 정면돌파 의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또 중·일 갈등에서 한국의 중간자적 위치도 공식화했다. 일본은 한·미·일 동맹에 방점을 두는 데 반해 우리는 양쪽을 병행하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한·일 공동 ‘희토류 콤비나트’ 구축해야
▶신각수 전 주일본 대사=셔틀 외교가 안정화됐고 정상 간 ‘케미스트리’(조화로운 관계)도 잘 맞았다. 직전 한·중 회담에서 공동 문서가 없었던 것과 달리 이번 양국 공동 발표문은 내용이 충실했고 미래 방향성을 시사했다. 다만 북한·중국 문제에선 전략적 입장 차이가 나타났다. 관건은 양국의 국내 정치다. 일본은 2월 총선에서 다카이치가 자민당 우위를 회복할지, 한국은 여당 강경파들이 대일 관계에 역점을 두는 이 대통령의 행보를 따를지가 변수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교수=양국 간 논의된 공급망 협력에서 희토류 협력이 핵심인데, 중국은 고도의 제련 기술은 물론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빠짐없이 활용하는 산업 생태계가 희토류 채굴지에 한데 모여 있는 ‘콤비나트’를 구축하고 있다. 수출 규제 시 한·미·일은 모두 타격을 받는다. 한·일도 단순 비축을 넘어 공동 제련이 가능한 콤비나트를 구축해야 한다. 다음 회담에선 이 의제가 대중 견제 및 공급망 재구축과 연결되도록 심화해야 한다.
화해·공존 위한 한·일 공동위원회 필요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지난 12일 NHK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이 ‘협력할 건 협력하면서 미래를 함께 나아가자’고 한 것은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에 가장 근접한 성숙한 발언이다. 한국이 영원한 피해자로만 남을 게 아니라 분야에 따라 일본을 리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반영됐다. 회담이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지 않게 양국 간 행동 규칙을 구체화하고 전략적 협력 틀을 훼손하지 않는 ‘가드레일’을 설치하는 게 중요하다. 과거사도 이번에 나온 인도주의적 접근을 적극 평가해야 한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역사 문제에 예민한 게 한국은 좌파, 일본은 우파인데 이번에 양국 좌우를 대표하는 정상들이 만나 우호적 분위기에서 조세이 탄광 조사를 약속한 건 잘한 일이다. 양 정상이 좌우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이 확인됐으니 4~5년 안에 역사 화해라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역사 화해와 공동 번영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실행을 담당할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게 어떨까 한다.
▶신현호 해울 대표변호사=기존 강제징용 소송 문제가 아직도 안 끝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피해자 지원을 몰아서 추진하면서 부작용들이 있다. 피해자 가족 간 재산 다툼은 물론 소송을 10년 넘게 지원한 변호사들도 허탈하게 됐다. 재단에 지금 남아 있는 돈이 없으니 어떤 형태로든 추가 지원을 받아 일본 측과 마무리지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반일 교육을 받아 온 우리 국민인데 갑자기 양국 정상이 만나 미래지향적으로 가자고 하면 과연 설득될지 우려된다.
중·일 갈등엔 전략적 모호성 유지가 최선 ▶권태환 전 주일본 무관=이 대통령이 지난 12일 NHK 인터뷰에서 “(중·일 갈등에 대해) 우리가 깊이 관여하거나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는 중립 유지 발언을 했는데, 바꿔서 얘기하면 한반도 분쟁이 터졌을 때 일본이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것과 같은 발언이다. 일본은 양안 문제가 일본 안보에 큰 영향을 주기에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대만 유사시 개입’이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한국 입장에선 이런 표현을 좀 더 정제해 쓸 필요가 있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외교적 ‘중립’은 자칫 양쪽을 다 잃을 수 있으므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중국이 의도적으로 중·일 긴장을 고조하고 있단 점과 대만해협 안정이 우리와도 직결된다는 점을 유의해 발언 수위를 고민해야 한다. 원화 가치 하락 대응을 위해 한·일 통화 스와프를 10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해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CPTPP 가입의 관건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문제도 국제기구가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만큼 우리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박문수 미래와가치 회장=이재명 정부가 대중·대일 관계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게 애매모호하다고 지적하는데, 우리 현실에서 그 이상의 대안이 없다. 이번에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했다고 본다. 과거사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
일, 독도 도발 말고…한, 역사적 화해로 가야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결국 과거사 갈등에서 중요한 변수는 국내 정치다. 일본도 2월 총선이 있고 우리는 6월 지방선거인데 갈등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특히 다카이치는 다음 달 22일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의 날에 차관급이 아니라 장관급이 가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이 카드를 또 쓰는 순간 한국의 좌파들과 일본의 우파들이 또 난리가 날 수 있다. 결국 역사적 화해라는 큰길로 가야 하는데 정부뿐 아니라 민간도 많이 노력해야 한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과거사에 대해 일본 정치권의 근본적 반성을 강요하기보다 미래를 위해 어떻게 관리할지 접근해야 한다. 배상이란 법률적 접근을 고수하는 여론은 국내에서도 소수다. 보수 진영과 민간이 주도하는 기금을 조성해 시민운동 차원에서 해결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저출생, 지방 소멸 등 공통 현안에 공동 대응하고, 안보·방산 등에서 민간 협력을 토대로 한·일 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한·일 관계는 일희일비하지 말고 ‘역지사지’하면 해답이 나온다. 28년 전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 했던 조언인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거사나 독도 문제에서 일본 총리와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역지사지해야 한다. 이번 셔틀 외교에서 양 정상이 특유의 소통 능력으로 역지사지를 성공적으로 실천해 관계 회복의 기틀을 닦았다고 생각한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우리 진보 정부와 일본 우익 정부의 만남이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처럼 큰 문을 열 수 있다. 이재명 정부 동안에 이를 조약 수준의 불가역적 합의로 격상해야 한다. 한·일보다 관계가 더 나빴던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협력도 소련이라는 공동의 위협이 있어 가능했다. 한·일은 중국이라는 거대 경제 위협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고 경제협력이 필수다. 한·일이 혼자서는 작아서 질 수밖에 없고, 그나마 2억 인구가 있어야 대응이 된다. 이를 위해선 역사 문제 해결이 필수다. 작은 단계부터 합의해 정권 교체와 상관없는 불가역적 기반을 닦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과제다.
◆한반도평화만들기=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하기 위해 2017년 11월 출범했다. 산하의 한일비전포럼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이고 전략적 해법을 찾고 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가 위원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