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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은 꿈도 꾸지 말라는 판결 [김성탁의 시시각각]

중앙일보

2026.01.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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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논설위원
“제가 제왕적 대통령이라면 공수처·경찰·검찰이 앞다퉈 저를 수사하겠다고 나서고, 내란죄 수사권도 없는 공수처가 영장 쇼핑, 공문서 위조까지 해가며 저를 체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헌법재판소 탄핵 재판 최종 의견 진술에서 했던 발언이다. “지금은 제왕적 거대 야당의 시대”라면서 비상계엄 선포의 원인을 '야당의 폭거' 때문으로 돌린 윤 전 대통령은 국민을 향한 ‘메시지 계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사 재판에서도 그는 발언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비상사태 여부와 계엄 필요성 판단은 대통령의 고도의 재량과 정치적 결단에 속한다”고 항변했다.

윤 전 대통령은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도 계엄 선포의 정당성 근거로 활용했다. 그는 “우리나라 선거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기간도 가장 길고 국민적 관심도 크다. 그만큼 직선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은 다른 선출직에 비해 무게가 다르다. 직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폭거는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계엄 선포의 절차나 요건을 두고 위헌·위법 논란이 있더라도 정치적으로 책임질 문제이지 사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6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체포 방해와 국무위원 심의권 침해 등 혐의 1심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퇴장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윤 전 대통령과 관련해 지난 16일 나온 첫 1심 판결에서 유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의 판단은 달랐다. 윤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에서 경호처 직원들에게 체포영장 집행을 막으라고 지시한 데 대해 재판부는 “경호처 공무원들을 이용해 자신에 대한 수사 기관의 적법한 영장 집행을 저지하거나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며 "일신의 안위와 사적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경호처 소속 공무원들을 사실상 사병화했다”고 질타했다. 이는 공무원의 임무가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 것으로, '짐이 곧 국가다'와 같이 대통령 개인이 제왕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못 박은 셈이다.

"국가에 충성하는 공무원 사병화"
대통령 책무성 무겁게 본 1심 판결
87체제 곧 40년, 분권형 개헌해야
계엄 선포 등이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오히려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책무성을 중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비상계엄과 같은 국가긴급권을 행사할 경우 오남용에 따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국무위원 모두에게 국무회의 소집을 통보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며 국무위원 심의권 침해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윤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주권자의 권한이 위임돼 있다는 주장도 펴왔는데, 재판부의 인식은 이 점에서도 달랐다. 오히려 국가 최고 공무원이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을 추궁했다. 허위 공문서 작성·폐기 혐의 등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누구보다 헌법을 수호하고 법질서를 준수할 의무가 있는데도 도리어 헌법과 관련 법령에서 정한 절차적 요건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여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설파했다.

이번 1심 판결의 취지는 윤 전 대통령만 새길 일이 아니다. 여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가진 이재명 정권,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대통령 모두 명심해야 한다. 87년 체제가 벌써 40년 가까이 돼 가고 있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의 경쟁만 극심할 뿐 국가적 해법은 찾지 못하는 대결적 양당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여대야소에선 일방적 국정 운영이 우려되고, 여소야대에선 국정 마비가 반복되고 있지 않나.

대선 때만 되면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분권형 개헌을 얘기하다 당선되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양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분권형 개헌을 공약했지만 정작 취임 후엔 뚜렷한 실행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느닷없는 비상계엄에서 보듯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번 판결이 한국형 대통령제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도록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다.




김성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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