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쯤이면 여야 정당들이 새 인물 영입이니, 정당 쇄신이니 하는 움직임들로 떠들썩해야 정상이다. 지방 선거가 6월에 있으니 여야가 주권자들 앞에서 새 단장을 하고 성의껏 다가서는 모습이라도 연출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주요 정당들의 현실은 쇄신과는 동떨어진 채 혼란만 가득하다.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은 지방선거 공천 관련 자금 수수 의혹에 휩싸여 있다. 민주당 윤리심판원은 사퇴한 원내 대표에게 제명 처분을 내렸고 공천 헌금 관련인들에게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어지럽기로는 제1야당인 국민의힘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해에는 자신들의 대선 후보를 새벽에 갈아치우기를 시도하더니 이번에는 2024년 말 계엄 해제 표결을 주도했던 전직 당 대표를 당 윤리위가 제명 처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충성·위계에 갇힌 국민의힘 정치관
탄핵 이후에도 정치적 고립 심화
민주당, 공천헌금 스캔들의 위기
도덕 명분으로 쌓은 권력의 위기
일련의 소동들을 정치권에서 종종 벌어지는 부패 스캔들이나 권력다툼으로만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정당들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나락으로 자유 낙하하고 있는 듯하다. 정당의 성패를 건 대형 선거가 코앞인데도 혼란스런 모습은 곧 위기가 심각하다는 증거이다.
필자는 지금의 혼란이 여야 정당을 지배하는 정치 귀족들의 권력 장악 서사(story)의 파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국민의힘의 주류를 이루는 관료 출신 테크노크라트(법원, 검찰, 행정부 출신)들은 과거 발전 국가 시대의 가치였던 군림, 위계, 충성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는 레거시 정치 귀족들이다. 국민의힘에 합류한 배경도 법원, 검찰, 행정부에서의 세속적 성공이었으니, 이들은 그저 해오던 관습대로 복종, 충성, 지시에만 매달린다. 이들 레거시 엘리트가 민주주의 시대의 정당정치가 요구하는 타협과 조정이라는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고립은 심화되고 윤어게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민주당의 주류를 이루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은 지난 20여 년간 도덕과 윤리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해 왔다. 586, 686들은 소수자 권리, 환경권, 청렴, 인권의 가치라는 새로운 도덕률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권력 강화에 성공해 왔다. 실제로 이러한 도덕률이 민주주의 심화에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도덕 명분을 통해 권력을 닦은 이들이 스스로의 갑질과 부패의 유혹에 무너질 때이다. 요즘의 공천헌금 소동은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도덕 명분으로 쌓아 올린 권력이 기초부터 흔들리는 위기이다.
국민의힘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산업화 시대의 적자임을 내세우는 국민의힘은 민주화 이후에도 법원, 검찰, 행정부 출신 관료들이 당의 다수를 차지해 왔다. 이들은 전직 검찰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레거시 정치 귀족으로서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가 참담하게 목격한 바와 같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민주정치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였다. 일방적 지시와 군림으로 30개월을 허송하다가 끝내 민주정치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폭으로 막을 내렸다.
계엄령 자폭 이후에도 국민의힘의 정치 귀족들이 달라진 것은 없다. 이들에게 정치란 오직 지배와 충성의 세계일 뿐이다. 당권파는 당내 비주류의 존재를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축출하려는 생각에 갇혀 있다. 되돌아보자면, 산업화 시대의 낡은 가치에 매몰된 채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레거시 엘리트들에게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도 긴 유예 기간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민주당의 경우에는 민주화 운동 출신들과 그 협력자들이 당의 주류로 부상해왔다. 수도권 지역구에는 3선, 4선, 5선의 경력을 쌓아 올린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즐비하다. 이들의 권력 장악은 민주화 이후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사회의 도덕률로 부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반(反)독재에 머물던 민주주의 가치의 지평을 소수자의 권리, 환경권, 인권, 평등과 같은 가치들로 확산하는 과정은 이들이 주도하였다. 민주화 투쟁과 저항의 대의는 이들이 앞세운 새로운 도덕률로 진화한 셈이다. 일본 학자 오구라 기조의 표현대로 민주화 운동 출신들은 민주화 이후 사회의 새로운 도덕과 명분을 선취하면서 정치 권력을 강화해왔다.
문제는 도덕과 명분은 장악하였지만, 이들의 개인 윤리는 민주화 이전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도덕률과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지만 더 많은 돈,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반칙, 편법, 갑질을 마다하지 않는 윤리적 모순이 불거져 왔다. 결국 권력 쟁취의 명분과 권력자들의 실제 삶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민주당 권력 엘리트들이 그려온 권력 서사도 기울어 가고 있다.
민심이 등을 돌리면, 정당들은 종종 ①쇄신파의 등장 ②당 조직과 인물의 쇄신 ③지지 회복과 선거 승리의 경로로 대응하기도 한다. 올 봄에 우리는 과연 진작에 수명이 다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스토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서사, 새로운 쇄신파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