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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투자 안하면 100% 관세" 뒤통수…난감한 K반도체

중앙일보

2026.01.18 12:00 2026.01.1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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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오른쪽)이 지난해 3월 3일 미국 백악관에서 대만 반도체 제조사 TSMC의 투자를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이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사실상 의무화하겠다고 엄포하면서 한국 반도체 업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18일 정부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정부와 함께 예의주시하겠다”는 ‘로키(low-key)’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예정에 없던 신규 투자 압박에 난감해하는 분위기다.

최근 블룸버그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주요 반도체 생산국에 대해 “미국에 투자하지 않을 경우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러트닉 장관은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공장 착공식에 참석해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려는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며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입됐다가 다른 나라로 재수출되는 반도체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포고령을 내렸다.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근거로 하는 반도체 포고령은 당장은 대만에서 인공지능(AI) 칩을 만들어 미국으로 들여온 뒤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는 엔비디아의 ‘H200’ 등이 대상이지만, 적용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관세 수익을 넘어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포석”이라고 평가했다.

박경민 기자
관세 불확실성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반도체 업계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추가 투자 여력이 적은 와중에 미국 투자를 늘려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 각각 360조원, 600조원 규모의 투자를 확정한 상태다. 고종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략기획실장은 “고객사인 빅테크가 주로 미국에 있기 때문에 추가 투자 자체는 고려해볼 수 있다”면서도 “반도체 공장 건설 비용과 인력 수급 부담 등을 고려할 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TSMC를 앞세워 미국과 밀착한 관계를 과시하는 대만의 행보도 한국에는 부담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는 TSMC가 2500억 달러, 대만 정부가 보증하는 대만 중소기업이 2500억 달러 등 총 5000억 달러(약 737조원)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 대신 미국은 대만 기업이 반도체 공장을 짓는 동안 생산능력의 2.5배까지 관세를 면제해주고, 이를 넘어선 물량은 우대 관세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또 공장 완공 후에는 생산능력의 1.5배까지 관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TSMC는 이미 애리조나주 피닉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에 약 1650억 달러(약 243조4600억원)를 투자했는데 추가 투자를 예고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6개의 반도체 공장(완공 포함)을 건설하는데, 이번 무역협정으로 5개를 추가로 짓기로 했다. 이 경우 TSMC의 미국 내 공장 수는 기존 계획의 두 배인 11~12개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미국을 방문해 대미 통상현안을 논의한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7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한국 정부도 반도체 경쟁국인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관철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해 한미 조인트팩트시트(JFS)에서 반도체 관세는 추후 ‘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no less favorable)’ 적용을 명시했다”며 “이 원칙에 기반해 미·대만 간 합의사항을 면밀히 분석하고 업계와 소통하며 미국 측과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향후 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의 대미 반도체 투자액이 대만보다 적다면서 추가 투자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예측할 수 있는 건 모든 게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 뿐”이라며 “수시로 협상 골대를 옮기기 때문에 여러 시나리오를 면밀히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술력, 역(逆)지렛대 삼아야”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이 반도체 기술력에서 앞서 있는 만큼, 협상에서 이를 역(逆)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 한국 기업이 주도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품귀 현상을 빚는 만큼, 국내 기업에 관세를 과도하게 부과하면 그 비용은 미국 빅테크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가 자국 기업을 때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단 점을 부각해 실익을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반도체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주장은 넌센스”라며 “공급망 우위를 앞세워 냉정히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오는 29일 2025년 4분기 실적발표와 설명회(콘퍼런스콜)에서 관련 소식을 전할지에도 이목이 쏠린다. 두 기업이 같은 날 실적발표를 하는 건 처음이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양사가 이날 실적과 전망 발표를 넘어 미국 투자 확대 계획 등 이례적 메시지를 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영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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