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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마음 읽기] 말과 채찍 그림자

중앙일보

2026.01.20 07:17 2026.01.2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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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최근에 석전 스님이 쓴 ‘영주기행’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근대불교의 고승이었다. 스님은 1924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제주를 방문했다. ‘영주(瀛洲)’는 제주도 한라산을 일컫는다. 이 글에는 제주의 풍광과 사찰과 인심이 잘 드러나 있다. 스님은 『여지승람』에 전해지는 문장을 함께 소개했다. 일례로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을 대하였구나.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로다”라고 적힌 문장을 소개했다. 석전 스님의 기행문에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가히 백미라고 할 만했다. ‘삼성사를 찾아’라는 제목의 한시에는 이런 시구가 있었다. 스님은 “보리수와 녹나무, 솔과 개오동 무성하여 그늘 짙도다/ 눈여겨보니 높은 갓 갖춰 쓴 순박한 사람들/ 옷깃을 풀어 제치며 크게 웃으니 숲속 그늘도 가득 차도다”라고 읊었다.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가꾼 그늘에 순박한 사람들이 한가한 때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이 다함께 크게 웃으니 그 웃음소리가 그늘에 가득 찼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시구에 깊은 운치가 있었다.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말
등 때리고 고삐 좨야 달리는 말
올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김지윤 기자
제주를 찾아왔기 때문일 테지만, 말에 관한 시심이 곳곳에 표현되어 있었다. “더벅머리 아이가 채찍 휘두르며 비스듬히 말에 오르는 곳”이라고 노래한 대목이 있었고, 또 관음사에 잠시 머물 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에는 “차를 우리어 감귤나무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듣다가/ 말 울음소리 들으며 불경도 읽는다”라고 감상을 적었다. 실로 놀라운 것은 수일 동안에 걸친 제주 기행의 소회를 어쩌면 이처럼 명문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또한 기행문의 여기저기에 말을 보고 지니게 된 느낌을 밝히고 있었다. 제주라는 곳이 가히 말의 고장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말의 해를 맞아서 말을 소재로 해서 쓴 시도 몇 편 찾아 읽었다. 나도 올해에는 말을 글제로 삼아서 시를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했다. 정지용의 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시 ‘백록담(白鹿潭)’에서는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라고 썼다.

또 ‘말’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는데, 나는 이 시가 각별하게 좋았다. 정지용 시인은 이 시를 1927년에 발표했다. 시는 이러했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말의 큰 덩치를 “다락”에 비유했고, 특히 사람과의 높은 친연성을 노래했다.

정지용 시인은 말을 보면서 어떤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라는 대목에 그런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다른 시 ‘말 2’에서도 공통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말아, 누가 낳았나? 너를. 너는 몰라./ 말아,/ 누가 낳았나? 나를. 내도 몰라./ 너는 시골 뜸에서/ 사람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살고/ 내사 대처 한복판에서/ 말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다 자랐다./ 시골로나 대처로나 가나 오나/ 양친 못 보아 서럽더라.” 말이 “사람스런 숨소리”를 갖고 있으나, 어미를 모르고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이러한 생각에는 식민지 시대의 상황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정지용 시인은 또 다른 시에서는 말을 사람의 “형제”라고 적었다. “꼬리 긴 영웅(英雄)”이라고 쓰기도 했다.

불교의 경전에도 말이 등장한다. 이런 말씀이 실려 있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말이 있다. 첫 번째로 좋은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면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이며, 두 번째로 좋은 말은 채찍으로 털끝을 조금 스치기만 해도 달리는 말이다. 세 번째로 좋은 말은 살갗에 채찍이 떨어져야 달리는 말이며, 네 번째로 좋은 말은 채찍으로 등을 맞고 고삐를 잡아채야 달리는 말이다.”

양마(良馬)가 어떤 말인지를 설하고 있는 이 경의 이름은 『편영경(鞭影經)』인데 ‘편영’은 채찍의 그림자를 뜻한다. 이 경은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공부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궁구하게 한다. 생사(生死)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처럼 그 실상을 바로 알아서 수행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제주에서는 넓은 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말 방목지는 제주의 10대 풍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1월이 다 가기 전에 키가 “다락”처럼 크고, 성품이 점잖고, 우리의 “형제”이고,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릴 줄을 아는 말을 보러 방목지에 한 차례 가봐야겠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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