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유 시장의 지도가 다시 그려질까. 석유 시장의 지배적 세력인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한 뒤 세계 원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손에 넣고 국제 석유 시장을 재편할 기세다.
저금리만큼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집착하는 것이 저유가다. 트럼프는 국제 유가를 배럴당 40~50달러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OPEC에 증산을 압박해왔다. OPEC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베네수엘라를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에 미국 석유회사를 끌어들여 영향력을 키우고 생산을 늘리겠다는 게 트럼프의 구상이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접수하며
미국, 세계 매장 원유 30% 장악
낙후한 인프라,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 확대에 막대한 비용 들 듯
공급 관리로 가격 통제한 OPEC
감산과 증산 사이 계산 복잡해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JP모건을 인용해 “베네수엘라가 트럼프의 수중에 들어가며 미국이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30%를 장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미국 대기업이 석유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남미 산유국 가이아나의 매장량까지 포함한 수치다. 심지어 트럼프는 지난 9일 메이저 석유회사 경영진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은 자리에서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원유 보유량을 합하면 전 세계 55%”라고 말하며 투자 참여를 종용했다.
JP모건은 “미국이 세계 석유 시장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제 유가를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묶어두고 미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 에너지 시장의 패권 구도를 재편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창립 회원국인 베네수엘라가 트럼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서 OPEC이 풀어야 할 방정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WSJ은 “미국과 브라질, 가이아나 등이 석유 생산을 늘리며 OPEC의 영향력은 이미 줄어드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 속 유가 지지를 위해 감산을 택하면 시장점유율과 수익 감소를 피할 수 없다. 증산을 압박해 온 트럼프와도 척을 지게 된다. 반대로 생산량을 늘리면 유가는 더 떨어진다.
‘석유 무기화’한 70년대, OPEC 황금기 글로벌 원유 시장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긴 역사의 핵심은 공급 관리를 통한 가격 통제다. 대표적인 게 미국 록펠러 가문의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다. 19세기 중반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로 상업 유전이 발견된 이후 1911년 해체될 때까지 미국 석유 산업을 장악하며 공급을 관리했다. 해체된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는 주요 메이저 석유회사로 나뉘며 글로벌 석유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가 됐다.
국제 석유 질서를 양분했던 미국과 영국의 비호 속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석유 패권은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는 7대 국제 메이저 석유회사가 장악했다. 이들은 중동에서 석유 생산과 정제·유통을 담당하며 원유 판매 이익의 절반을 가져가고, 산유국 정부는 세금과 로열티 형태로 수익을 배분받았다. 석유회사와 산유국이 수익을 5대5로 나눈(반분 원칙) 것이다.
문제는 세븐 시스터스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원유 공시 가격이었다. 당시 산유국과 석유 회사 간 수익 분배는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이뤄졌는데, 공시 가격을 낮추면 산유국의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서구 열강과 석유 회사가 차지하는 이권을 되찾기 위해 산유국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며 존재감 강화에 나섰다. OPEC의 등장이다.
OPEC은 1960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5개국이 결성했다. 이들 5개국이 당시 원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했지만 초기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원유의 공급 과잉에다 석유 개발과 판매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등을 메이저 석유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며 OPEC은 황금기를 맞는다. 미국의 원유 수요가 늘어나면서 OPEC의 가격 협상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석유의 무기화’가 촉발한 석유 파동을 거치며 유가는 급등했다. 석유 산업의 주도권은 산유국으로 넘어갔다.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OPEC이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선물시장 등장에 가격 결정력 약화 석유 패권을 잡았지만 OPEC의 가격 통제는 쉽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도 감산으로 고유가를 유지한 OPEC의 전략은 이내 역풍을 맞았다. 비싼 가격과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수요는 줄었다. 반면 고유가가 알래스카와 멕시코만, 북해 등의 신규 유전 개발을 부추기며 OPEC 비회원국의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며 공급 과잉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원유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OPEC이 꺼내 든 카드가 ‘생산량 쿼터(할당)제’다. 맏형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과 감산을 오가며 산유량을 조절해 원유 시장의 수급 균형을 맞추고 시장의 안정을 꾀하는 ‘스윙 프로듀서’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결국 OPEC은 고정 가격제를 포기하고 생산량 쿼터제를 통해 시장에 기반해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OPEC이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석유 시장을 압도하긴 했지만 OPEC의 영향력을 뒤흔드는 도전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에너지기구(IEA) 설립이다. 세계은행은 “1973년 유가 급등 사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전략 비축유(SPR)를 구축하는 등 정책 대응 조율을 위해 1974년 IEA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석유공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IEA 회원국은 전년도 일평균 순수입 물량의 90일분에 해당하는 비축유를 보유해야 한다. 실제로 IEA는 1991년 걸프전과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로 미국 석유 생산 시설이 파괴된 2005년, 리비아 내전(2011년)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이후 2번을 포함해 총 5차례 전략 비축유를 비상 방출해 가격 안정을 꾀했다.
석유 선물 시장의 등장은 OPEC의 가격 결정력을 약화하며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1983년 미국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유(WTI) 선물 거래가 시작되면서 실제 수요자에 투기적 수요까지 가세하며 가격 결정의 헤게모니가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었다.
에너지 시장의 구조 변화도 OPEC에 위기가 됐다. 천연가스와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에너지원의 등장으로 전 세계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에너지 소비에서 절반가량을 차지하던 석유 비중은 2020년에 30%대로 줄었다. 국내총생산(GDP) 단위당 석유소비량을 나타내는 석유 집약도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 시장 지배력 강화 힘 빠진 OPEC의 시장 점유율을 제대로 잠식한 것은 셰일 혁명이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석유 수요 증가로 국제 유가가 뛰자 셰일 원유의 경제성이 확보되면서 가능해진 셰일 원유 개발로 국제 석유 시장에서 미국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시장 지배력도 강화됐다. 미국은 2019년 원유 순수출국으로 전환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손에 쥐며 석유 시장 새판짜기에 나섰지만 베네수엘라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매장량(3032억 배럴)은 세계 최대 규모로 전 세계 매장량의 20%에 달하지만 생산량은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심지어 OPEC의 생산량 쿼터 할당에서 제외돼 있을 정도다. WSJ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베네수엘라는 하루 90만 배럴 수준의 원유를 생산했다. 이는 OPEC진영의 일일 생산량(약 4300만 배럴)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OPEC 일부 회원국은 트럼프의 전략대로 미국 석유 기업이 베네수엘라에 다시 진출해 석유 개발에 나선다면 향후 3년 내에 일일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안팎으로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며 관망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 1천억 달러 필요” 베네수엘라가 국제 원유 공급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때까지 넘어야 할 장애물은 한둘이 아니다. 국제 사회의 제재와 수출 제한, 국유화에 따른 투자 부족, 낙후된 인프라 및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상당한 자금 투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베네수엘라 원유는 대부분 정제 비용이 많이 드는 중질유인 탓에 수익성 확보를 장담하기 어렵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국유화 조치로 수차례 몰수 조치를 당했던 미국 석유회사가 안전장치 없이 베네수엘라 시장에 다시 들어갈지도 의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이라는 트럼프의 계획을 시행하는 데 약 1000억 달러의 비용과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발 석유 재편 시도로 OPEC 카르텔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WSJ은 “막대한 원유 매장량이 미국의 통제 하에 들어가 OPEC의 영향권에 벗어나게 되면서 시장 관리는 복잡하고 힘들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옥슬리 캐피털 이코노믹스 기후·원자재 부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OPEC 회원국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면서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며 “둘 사이의 긴장이 세계 석유 시장을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