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안구 정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거북목을 한 채 종일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속 세상에서 시선을 거두고 생동감 넘치는 야생의 세계를 응시할 시간이 절실하다. 하여 ‘새멍’을 제안한다. 멍하니 새를 바라보자는 말이다. 뭇 생명이 움츠러드는 계절, 겨울을 나기 위해 시베리아나 몽골 같은 먼 북쪽에서 날아든 철새를 만나는 순간만큼 가슴 뛰는 일도 없다. 국내 최대 두루미 도래지인 강원도 철원으로 탐조 여행을 다녀왔다.
두루미 7종 서식, 전 세계서 유일
철원은 두루미의 낙원이다. 북한 접경지라는 삼엄한 환경이 도리어 완벽한 서식 조건이 된다. 드넓은 비무장지대, 먹거리 풍성한 민북지역(민간인출입통제선 이북 지역)의 농경지, 겨울에도 얼지 않는 강과 습지가 갖춰졌다.
이게 다가 아니다. 철원군은 물론이고 주민도 나서 두루미의 겨우살이를 돕는다. 추수가 끝난 논에 볏짚을 남겨두고, 무논(물 댄 논)을 조성할뿐더러 겨우내 주요 서식지에 곡식 약 50t을 깔아준다. 철원군은 2013년부터 두루미 탐조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코스는 두 개다. 1코스는 자연환경해설사와 함께 차를 타고 민북지역을 둘러보고, 2코스는 한탄강변 탐조대에서 자유롭게 새를 관찰한다.
지난 9일 오전 10시 1코스 체험을 위해 동송읍 ‘DMZ 두루미 평화타운’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제2땅굴을 방문하는 DMZ 관광도 출발하는데, 겨울이어서인지 탐조 관광이 더 인기였다.
“전 세계서 두루미 7종을 볼 수 있는 곳은 철원이 유일합니다. 운이 좋으면 쇠재두루미, 캐나다두루미 같은 희귀종도 볼 수 있습니다.”
김미숙 철원군 자연환경해설사가 두루미 전시관에서 10여분간 두루미를 설명했다. 투어 참가자 여남은 명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양지리 군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두루미가 등장했다. 약 10m 거리에 키 120㎝가 넘는 대형 조류가 나타나자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새빨간 눈동자부터 은은한 회색빛의 깃털 한 올 한 올까지 선명히 보였다.
한국전쟁 격전지 견학까지
철원군은 지난해 11월 29일, 두루미과 새의 개체 수를 약 1만2000마리로 파악했다. 재두루미가 약 1만 마리, 두루미가 1500마리였다. 재두루미는 철원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흑두루미는 순천만, 천수만 같은 중남부지방 갯벌을 좋아한다.
두루미는 다르다. 전 세계에 약 5000마리뿐인 멸종위기종이다. 이 귀한 두루미가 철원을 각별히 좋아한다. 경기도 연천, 인천 강화도에도 일부 상륙하지만 대부분 철원으로 날아든다. 이기섭 물새네트워크 상임이사는 “2020년 이후 철원을 찾는 두루미가 꾸준히 느는 추세”라며 “철원이 안전하기도 하거니와 다른 지역의 서식 환경이 악화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차가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더 많은 두루미가 보였다. ‘단정학(丹頂鶴)’이라는 한자 이름대로 정수리의 붉은 점이 도드라졌고, 흑과 백으로만 이뤄진 털 빛깔이 단아한 멋을 풍겼다. 두루미는 가족애가 남다르다. 일부일처를 고집하고, 새끼는 두 마리를 낳는다. 실제로 네 마리씩 짝을 이룬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철원군의 두루미 탐조 관광은 새만 보지 않는다. 평화·안보 관광지도 둘러본다. 느릿느릿 논길을 달리던 버스가 낮은 언덕에 참가자들을 내려줬다. 아이스크림 고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이 고지 탈환을 위해 포탄을 쏟아부은 탓에 산 정상이 아이스크림 녹듯이 사라져버린 현장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 너머의 북한 선전마을이 한눈에 담겼다. 월정리역도 방문했다. 과거 서울과 원산을 잇던 경원선의 간이역으로, 전쟁 당시에 탈선한 열차의 잔해가 전시돼 있었다.
쇠기러기·큰고니…새들의 낙원
2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평화타운 매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동송읍 이길리에 자리한 탐조대를 찾아갔다. 이곳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었다. 6개 컨테이너 중 한 곳에 들어가서 창 너머 한탄강을 굽어보는 게 전부였다. 방문객 대부분은 이른바 ‘대포 망원렌즈’를 챙겨온 취미 사진가였다. 울산,
약 100m 거리의 모래톱과 얼어붙은 강가에는 두루미와 재두루미 말고도 새 수천 마리가 모여 있었다. 쇠기러기와 청둥오리처럼 작은 새들은 바쁘게 먹이 활동을 하다가 맹금류가 나타나면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쳤다. 큰고니는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다가 시끄럽게 소리치며 싸워댔다. 헤엄을 못 치는 두루미는 모래톱에 깔린 곡식을 쪼아먹었고, 목을 치켜들고 ‘두루두루’ 소리치기도 했다. 두루미의 울음소리는 6㎞ 거리까지 뻗어간단다.
옅은 눈발이 날린 이튿날 아침, 다시 탐조대를 찾았다. 수백 마리 두루미가 하얀 카펫이 깔린 모래톱에 모여 있는 모습이 남극의 펭귄 떼 같았다. 눈바람을 헤치고 단체로 비행하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이날 기온은 영하 10도. 난방 장치가 없는 컨테이너에서 3시간 동안 새만 봤다. 아이맥스 영화보다 몰입도가 컸다.
여행정보
철원 두루미 탐조 관광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운영한다. 민통선 안쪽을 둘러보는 1코스는 화~일요일, 하루 두 차례 2시간씩 진행한다. 이용권(어른 1만5000원)을 사면, 철원사랑상품권(1만원)을 준다. 1코스 이용권으로 2코스 탐조대도 갈 수 있다. 매일 운영하는 탐조대도 1만5000원이다. 다만 탐조대 이용권으로 1코스를 참가할 순 없다. 추위를 대비해서 따뜻한 물, 핫팩 등을 챙기길 권한다. 철원군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