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테크는 물론 전 세계 인공지능(AI) 업계에 충격을 준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등장 이후 1년, 중국산 AI가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은 접근성은 높이고, 비용은 낮춘 개방형(오픈소스) AI 모델을 무기로 전 세계 개발자들이 실제 손에 쥐고 쓰는 기술이 됐다. 1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중 AI 패권 경쟁에서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1년 전 딥시크는 추론 모델 ‘R1’을 공개하며 돈과 연산을 태울수록 성능이 오른다는 AI 업계 불문율 ‘스케일링 법칙’에 균열을 냈다. 미국 빅테크처럼 수만 개의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동원하지 않고도 그와 맞먹는 성능을 구현하자 시장에서는 “AI의 스푸트니크 모멘트”(마크 앤드리슨 a16z 공동창업자), “우리보다 뛰어난 모델을 내놓을 것”(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의 반응이 나왔다.
딥시크 이후 1년 간 중국 AI 생태계는 빠르게 움직였다. 딥시크는 R1을 누구나 내려받아 수정·재학습해 쓸 수 있는 ‘오픈웨이트(open-weight)’ 방식으로 공개했다. 성능은 뛰어나지만 사용량에 따라 매번 비용이 발생하는 미국 빅테크의 폐쇄형 모델과 달리, 오픈웨이트는 개발자가 모델을 직접 쥐고 원하는대로 조정할 수 있다. 이 방식은 중국산 AI의 영향력을 키워낸 핵심 전략이 됐다. 알리바바의 큐원(Qwen), 문샷의 키미(Kimi) 등 중국 AI 기업들도 잇따라 오픈웨이트 모델을 공개하며 생태계를 넓혔다.
스탠포드 인간중심 AI 연구소(HAI)에 따르면 글로벌 오픈소스 플랫폼 허깅페이스에 공개된 파인튜닝 AI 모델(기본 모델을 목적에 맞게 개조한 AI 모델)의 63%가 중국 모델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산 AI가 글로벌 개발 현장에서 기본 옵션처럼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MIT와 허깅페이스의 공동 연구에서도 지난 1년 간 중국산 모델의 글로벌 다운로드 점유율은 17%를 기록하며 미국(15.8%)을 앞질렀다.
이 같은 흐름은 AI 패권 경쟁의 판 자체를 흔들고 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미·중 AI 경쟁은 반도체와 수출 통제를 중심으로 설명됐다. 미국이 최첨단 GPU의 중국 공급을 차단하면 AI 경쟁에서 자연스럽게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적은 GPU로 학습 효율을 올린 중국 모델의 확산은 이 전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 박승찬 중국경영연구소 소장은 “중국에서 AI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면 트럼프에게 고맙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며 “미·중 갈등이 중국 AI의 발전을 끌어올린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AI 패권의 중심인 실리콘밸리에서도 중국산 AI는 외면하기 어려운 선택지가 됐다. 성능 격차는 빠르게 줄어든 데다 비용과 운영 측면에서 유연성이 크다는 점이 일반 개발자들의 선택을 바꿨기 때문이다. 미국 AI 기업들이 아이폰의 운영체제 iOS처럼 폐쇄적이고 고가의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하는 사이, 중국은 구글 안드로이드 방식의 ‘개방 전략’을 택했다. 모델을 널리 풀어 다양한 파생 모델과 활용 사례를 낳고, 이를 통해 글로벌 개발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방식이다. MIT테크놀로지리뷰는 지난 12일 “암암리에 더 많은 실리콘밸리 애플리케이션이 중국 오픈소스 모델을 기반으로 출시될 것으로 보이고, 중국과 서구의 최첨단 모델 사이의 출시 시차도 수개월에서 수주,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하로 짧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은 글로벌 AI 생태계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개발 비용과 인프라 제약이 큰 아프리카·동남아·중동 등 비미국권 시장에서 중국 모델의 채택은 빠르게 늘고 있다. 브래드 스미스 마이크로소프트(MS) 사장은 13일(현지시간) FT와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 같은 신흥 시장에서 딥시크의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며 “미국 기업들이 전 세계적으로 직면한 경쟁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수익성만 놓고 보면 미국 기업들이 당장은 유리할 수 있지만, 한 번 선택된 AI 모델과 개발 도구는 쉽게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중국 기업들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백서인 한양대 글로벌문화통상학부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위에는 미국의 폐쇄형 모델이, 하부 저변에는 중국산 오픈소스 모델이 깔리는 이중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사업 1차 평가에서 네이버클라우드는 중국산 AI 모델인 큐원을 활용한 점이 문제가 되며 탈락한 바 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20일 자신의 SNS에 “딥시크-R1은 저사양 칩으로 최고 수준의 성능을 구현하며 빅테크 중심 구조에 균열을 냈고, 글로벌 시장의 평가와 산업 지형까지 흔들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분명한 문제 의식을 던졌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AI 개발에서 ‘중국 기술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누구나 쓸 수 있게 개방된 오픈웨이트 모델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서부터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단계로 논의가 옮겨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김명주 AI안전연구소장은 “전 세계 소프트웨어의 80~90%는 이미 오픈소스 기반”이라며 “중요한 건 배제가 아니라 사업과 데이터 특성에 맞춰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정교하게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