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시절 ‘기록제조기’로 불렸던 이창호 9단이 지난해 12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스승 조훈현 9단의 통산 최다승(1968승)을 넘어서는 1969승을 기록한 것이다. 잔잔하지만 감동적인 기록이었다. 지지 않는 소년, 신산, 돌부처 등 수많은 별명과 함께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50세)가 된 이창호의 바둑인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세계가 뒤를 쫓던 무적의 존재에서 지금은 랭킹이 많이 떨어진(59위) 시니어 기사가 됐지만 매일 바둑과 대면하며 수도자처럼 살아간다. 신기한 것은 최근 들어 이창호의 승률이 부쩍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건강도 좋아지고 AI를 받아들이며 뭔가 새로운 터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대하게 만든다.
이창호·신진서 잇단 기록 작성
유하준 9세6개월 최연소 입단
중국 도전받는 한국 바둑 미래
지난해 12월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기록이 세워졌다. 유하준이란 소년이 9세6개월 만에 프로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최연소 입단 기록은 조훈현 9단이 세운 9세7개월이었다. 다른 기록은 다 깨져도 이 기록만큼은 도전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63년 만에 그걸 23일 앞당긴 것이다.
바둑 동네에서 ‘빠른 입단’은 중요한 이슈다. 일류가 되려면 빨리 프로가 되는 게 중요하다. 조훈현 9세, 이창호 11세, 이세돌 11세, 박정환 13세, 신진서(사진) 13세 등 일인자 계보는 입단이 매우 빠르다. 이런 면에서 유하준의 기록은 강하게 시선을 끈다. 하지만 유하준은 12세 이하만 출전하는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조훈현의 기록은 정규입단대회에서 성인들과 경쟁하여 만든 기록이니까 유하준의 기록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연 기록을 깼는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바둑계는 유하준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한다.
‘양신’이라 불린 신진서-신민준 이후 바둑계는 천재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시대마다 천재 한두명이 끌고 온 한국바둑을 생각하면 천재가 안 보인다는 사실은 보통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유하준이란 소년의 등장이 비할 바 없는 청량감을 안겨준다. 유하준의 또 하나 놀라운 점은 AI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두고 싶은대로 둔다고 한다.
신진서 9단과 김은지 9단은 한국바둑 남녀 최강자다. 실시간으로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국내 일인자의 기록에 도취할 수 없다. 일인자에겐 의무가 하나 있다. 중국의 공세에 맞서 갑옷을 걸쳐 입고 결전에 나서야 한다. 중국에 계속 지면 바둑의 인기는 땅에 떨어진다. 최소한 막상막하의 형세를 이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두 주인공의 기록을 보자. 신진서 9단은 2000년 부산에서 태어나 2013년 입단했고 2018년 최우수기사가 됐다. 이후 한국바둑의 일인자이자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다. 지난해 승률 1위, 연승 1위. 현재 73개월째 한국랭킹 1위. 상금도 단연 1위다. 지난해 12억900만원을 벌었고 누적상금은 99억원에 육박해 곧 100억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한 분야의 일인자치고는 상금이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둑 상금은 조금 다르다. 11세의 초등학생도 프로가 돼 시합에 나가면 어김없이 돈을 받는다. 이게 좋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스포츠에 비해 일찍 돈을 벌어 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확실하다. (유하준 초단도 오는 2월 이붕배라는 소규모 대회에 첫 출전 예정인데 예선 결승에 올라가면 상금 20만원을 확보하게 된다)
여자랭킹 1위 김은지 9단은 2007년 서울 생이다. 지난해 다승 1위, 최다대국 1위, 상금 1위를 기록했다. 2025년 상금은 4억원. 누적 상금은 9억3000만원. 12세에 프로가 되어 3년 11개월 만에 9단에 올라 최연소, 최단기간 9단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여자바둑에는 최정 9단도 있다. 남녀가 다 출전하는 삼성화재배 세계대회서 결승까지 올랐던 전설적 강자다. 그 최정과 함께 김은지가 버티는 여자바둑은 당분간 중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9세 김은지는 최전성기에 접어든다. 승부사의 두둑한 심장, 강인한 신경선을 지닌 김은지가 올해 잊지 못할 기록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남자바둑은 쉽지 않다. 중국의 공세가 훨씬 맹렬하다. 중국의 대군이 이미 성 밑에 당도한 형세라고 봐야 한다. 한국 총사령관은 26세 신진서인데 중국기사들은 신진서를 집중 연구해 모르는 게 없다. 신진서도 그만큼 고단하다. 그러나 신진서는 중국의 강자들에게 13연승을 거둔 적이 있다. 농심배에서 6연승 역전 우승기록도 있다. 그때의 힘, 그때의 기록이 올해 절실히 필요하다. 전성기에 접어든 지 8년째인 신진서에게 올해는 진퇴를 가르는 운명적인 한 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