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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인간사] 위대한 문장 제조기

중앙일보

2026.01.21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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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가
돌이켜 보니 과거 내가 읽은 소설 가운데 오늘날의 인공지능(AI)을 연상시키는 물건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 소설’이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다만 ‘위대한 문장 제조기’라는 제목과 줄거리는 대략 기억났다.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집에 들어앉아 타자기 앞에서 뭔가를 써보려고 하는 중이다. 그의 뇌리에 얼마 전 동료 소설가에게서 들었던 풍문이 떠오른다. 어떤 남자가 소설가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제공할 테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소설가로서 글을 쓸 권리를 자신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AI 비슷한 기계 나오는 옛 소설
제목 잊어버려 AI에 물었더니
줄거리·목차까지 창작해 답변
인간을 학습해 거짓말 배웠나

김지윤 기자
그 남자는 발명가였다. 그는 다년간 각고의 노력을 거친 끝에 문장을 자동으로 생산하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 기계에는 자판은 물론이고 비행기 조종석처럼 손잡이와 스위치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기계를 작동하기 전 적절히 손잡이를 조작함으로써 본인(혹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문장과 작품, 혹은 글을 생산하게 할 수 있다. 그런 뒤 그는 수백 명의 작가를 섭외해 그들이 잡지나 출판사, 언론사로부터 청탁받은 원고를 자신의 기계에서 산출되는 ‘공산품’으로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계약한 소설가들에게 돌아올 원고료나 인세는 모두 그 남자의 차지가 된다. 그 기계의 이름은 ‘위대한 문장 제조기’이다.

소설가는 혹 자신에게까지 그 남자로부터 연락이 올지, 온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방 밖에서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 소리는 커지는데 소설가의 눈에 자신의 집 입구에 차가 와서 멈추고 007가방을 들고 값비싼 양복을 빼입은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는 게 보인다.’

한동안 기억을 더듬은 끝에 위의 글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가로 스위스 출신의 페터 빅셀(1935~2025)을 떠올리기는 했다. 작년에 타계한 그는 내가 아는 한 분명히 미래의 소설가 후배들이, 소설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살아남을지 관심이 있어 할 사람이었다.

좀 더 명확한 사실을 도출하기 위해 전부터 내가 해오던 방식으로 내용을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문의를 해보기도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기도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페터 빅셀이 ‘위대한 문장 제조기’로 불린다는 언급 외에는. 결국 사방에 널려 있는 무료 AI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한 AI에서 금방 답이 나왔다. 독일어로 ‘Die Machine(기계)’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 그 소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가다. 그는 항상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언제나 실패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며 자신이 쓴 문장을 지우곤 한다. 그는 좋은 문장, 아름다운 문장, 살아 있는 문장을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그는 결심한다. 나 대신 기계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하자고. 그는 기계를 하나 발명한다. 그 기계는 종이를 먹고 문장을 뱉어낸다. 처음엔 엉망이다. 문장은 어색하고, 말이 안 되고, 의미가 없다. 그는 기계를 길들여 점점 더 정확한 문장을 생산하도록 고쳐나간다. 기계는 계속 배운다. 패턴을 습득하고, 리듬을 익히고, 이야기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계가 소설가보다 더 좋은 문장을 써낸다. 작가는 처음엔 기뻐했지만 차츰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문장이 문장을 낳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다. 기계는 밤새 글을 쓴다.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문장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기계가 그보다 더 잘 쓰고 있으니까.

그는 자리를 비운다. 기계는 계속 글을 쓴다. 소설가는 사라지고, 기계는 남는다.’

그런데 AI가 제공한 이 소설의 줄거리는 상당 부분 창작에 가까웠다. 아니 ‘AI 환각(Hallucination, 생성형 AI가 사실이 아니거나 존재하지 않는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페터 빅셀의 소설집에 함께 실려 있다는 다른 소설의 목차까지 첨부한 가짜 정보 말이다(후에 알게 된 바 애초에 내가 읽었던 소설의 작가는 영국의 로알드 달이고 1953년 작인 소설의 제목은 『위대한 자동 작문 기계(The great automatic grammatizator)』이며 내용은 내 기억과 비슷하나 형식상으로나 세부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내게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이 ×의 AI는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않는 거지? AI라는 게 사람이 만들었으니 사람 사이의 언어, 지식, 정보, 상식 등등이 바탕이 되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본디 인간이라는 존재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답을 내놓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지?

결론은, 당분간은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그 남자’가 찾아올 수도 있고.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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