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로 뚝 떨어진 날, 충남 공주에 갔다. 체감은 달랐다. ‘밤순대’와 ‘알밤모찌’가 이끄는 전통시장에서 배를 채우고, 눈 내린 고즈넉한 사찰을 거닐다가, 따뜻한 실내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화려하진 않지만 넉넉한 기분이 오래 남았다. 온기를 따라 도시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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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밤의 도시, 시장에서 만난 겨울 맛
공주는 밤의 도시다. 별이 빛나는 밤이 아니라, 단맛 고소한 열매 밤이다. 전국 밤의 16~20%가 공주에서 생산된다. 2000개가 넘는 농가에서 매년 약 7000t의 알밤을 깐단다.
이 밤이 가장 다채롭게 변신하는 현장이 공주산성시장이다. 밤이 간식이 되고, 술이 되고, 한 끼가 된다. 밤을 먹여 키웠다는 한우를 비롯해 꿀밤호떡·밤묵·알밤막걸리 등 별별 것이 다 있다.
시장 안쪽 ‘광장순대’에서는 일명 ‘밤순대’를 내놓는다. 일반적인 찹쌀순대 안에 공주산 밤을 더했을 뿐인데,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쫀득한 순대 속에서 밤이 씹히며 고소한 여운을 남긴다. 밤 순대와 살코기·내장이 담긴 순대국밥(1만원)이 대표 메뉴다.
김혜옥 사장은 비법을 묻자 “밤을 아끼지 않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이날 점심도 시장 상인과 손님으로 가게가 가득 찼다.
44년 내력의 ‘부자떡집’은 ‘알밤모찌(1개 2500원)’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찹쌀떡 안에 직접 쑨 팥 앙금 그리고 ‘특대’ 사이즈의 알밤이 통째로 들어간다. 주말이면 하루 최대 3000개 이상의 알밤모찌가 팔린단다. 영업 시간은 오전 9시부터지만, 1시간 미리 가도 손님을 받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나온 떡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다.
공산성 맞은 편 ‘밤마을 베이커리’에서는 ‘밤파이(2500원)’와 ‘밤라떼(5000원)’가 인기다. 다음 달 4~8일 공주 금강신관공원에서 군밤축제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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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가 된 ‘탑 위의 탑’
배를 든든히 채우고 태화산(416m) 자락의 마곡사를 향했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눈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곡사는 불자가 아니어도 들를 만한 산사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640년)한 천년고찰로,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대광보전 앞에 우뚝 선 오층석탑은 지난 9일 국보로 승격됐다.
마곡사 오층석탑은 이른바 ‘탑 위의 탑’이라 불린다. 육중한 기단 위에 5층의 탑을 올린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백미는 탑 꼭대기에 올린 청동 장식 ‘풍마동(風磨銅)’. 경내에서 만난 장길수 문화해설사는 “티베트·몽골에서는 흔해도 국내에서는 유일한 양식”이라며 “고려 후기 난세 속에서 꽃피운 불교 미술의 결정체”라고 추켜세웠다.
오층석탑은 임진왜란을 비롯해 숱한 전쟁과 재난을 버텼다. 마곡사 무주 스님은 무주 스님이 “풍마동에 ‘바람에 갈고 닦인 구리’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며 "시련을 견뎌야 비로소 빛이 난다는 의미가 현대인에게도 남다른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마곡사는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한 절집이다. 최근에는 MZ세대와 외국인의 발길도 잦아졌다고 한다. 사찰 뒤편으로는 3㎞ 길이의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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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역시 겨울 관광 코스로 손색없다. 무엇보다 무료고, 실내라서 따뜻하다. 2004년 개관해 2024년 10월 누적 관람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박물관에서 요즘 가장 붐비는 곳은 지난 연말 단장을 마친 어린이 체험실이다. 미끄럼틀과 놀이 공간을 갖춰 웬만한 키즈카페 못지않다. 무령왕릉을 수호하는 전설 속 동물 ‘진묘수’를 주제로 한 체험이 주를 이룬다. 어린이들은 진묘수 가면을 만들고 색칠하며, 디지털 화면을 향해 콩주머니를 던져 악귀를 쫓는 놀이를 즐긴다. 무령왕 의상과 관모 착용하고 즉석 사진도 남길 수 있다. 어린이 체험실도 이용료가 없다. 정원은 최대 30명(이용시간 40분). 박물관 관계자는 “주말에는 2시간 가까이 순번을 기다려야 할 만큼 반응이 뜨겁다”고 귀띔했다.
어른들의 발길은 별관의 수장고로 향한다. 일반 수장고와 달리 유물 보관 공간을 살펴볼 수 있는 관람형 수장고다. ‘보이지 않던 박물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부터 조선 시대 백자까지, 약 1800여 점의 유물이 사방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