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원전 건설에 부정적이던 이재명 정부가 결국 돌아섰다. ‘인공지능(AI) 3대 강국’ 실현을 위해선 재생에너지만으론 안된다는 현실적 인식 때문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나. 이 대통령과 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가계획(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도 이미 확정돼 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책을 마구 뒤집는 것은 정책의 안정성, 지속성 측면에서도 좋지 못하다“고 말했다. 앞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AI도 반도체도 전력이 관건이다, 신규 원전 건설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도 이달 초 토론회에서 “마음 같아선 전체 전력을 재생에너지로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렇게 하긴 쉽지 않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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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70%, 신규 원전 필요성에 찬성"
여론을 미리 읽은 것일까. 태세 전환 뒤 소관 부처인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주관한 여론조사가 21일 오후 나왔다. 신규 원전 건설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70%에 가까웠다(한국갤럽 69.6%, 리얼미터 60.5%). 신규 원전을 짓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순서는? 부지 확보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유치공모’를 내고, 지방자치단체의 신청을 받는 게 첫 순서다. 이후 부지선정위원회가 부지 조사와 주민 수용성 파악 등을 통해 부지를 최종 확정하게 된다. 과거 대통령 업무보고 때 얘기대로라면, 원전은 건설에만 7년, 부지확보까지 포함하면 15년이 걸린다. 어디가 가능할까. 주민들 반대는 없을까. 영화 ‘판도라’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탈원전을 부르짖는 주민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지난 12일 경북 영덕과 울산시 울주를 찾았다. 두 곳은 최근 유력한 신규 원전 부지로 거론되는 곳이다. 영덕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천지’라는 이름의 신규 원전 부지로 확정됐다가, 탈원전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 때 지정이 해제된 곳. 울주는 이미 새울원전 1ㆍ2호기(옛 신고리 3ㆍ4)가 가동 중이고, 3ㆍ4호기가 순차적으로 들어올 곳이다. 그런데, 예상 밖이었다. 주민들은 현 정부의 ‘신규원전 불가피’ 소식을 오랜 가뭄 뒤 비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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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폐허 속 '천지원전' 마을 석리
KTX 포항역에 내려 차를 타고 새로 난 동해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40㎞를 달렸다. 영덕IC를 나오니 ‘동해안의 척추’라는 7번 국도가 이어진다. 10여분을 다시 달리다 동쪽으로 빠져나오니 굽이굽이 도로 양쪽 산하가 끝도 없이 숯더미다. 황토 민둥산에 새까맣게 탄 성냥개비들을 꽂아놓은 듯했다. 지난해 3월 의성에서 시작해 안동ㆍ청송ㆍ영양ㆍ영덕에 이어 남쪽 울주까지 휩쓸었던 영남권 대형 산불의 흔적이다. 겨울산이라 더 그럴까. 10개월이 지났지만 참사의 현장은 세월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그 잿더미의 끝에 한때 ‘천지원전 부지’였던 영덕읍 석리마을이 있었다. 동해안 절벽에 마치 갯바위 조개처럼 붙어있어 ‘따개비 마을’이란 이름을 가진 곳이다. 마을회관에 걸린 사진 속 마을은 그림 같았다.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가파른 절벽에 붉은색ㆍ푸른색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곳. 그러나 이젠 옛 얘기가 됐다. 화재를 운 좋게 피한 몇 집을 빼곤 집터와 불타다 남은 소나무 몇 그루만 남았다. 절벽 아랫마을 포구엔 폐허와 어울리지 않는 4층 규모의 최신식 건물이 있었다. 원전부지에서 해제된 후 정부에서 마을 살리기 차원에서 지어준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건물이지만, 준공 직후 영남 산불이 덮치는 바람에 지금껏 한 번도 문을 열어보지 못했다. 20가구 70여명 마을 주민은 언덕 위에 마련된 27㎡(약 8.2평) 규모의 임시 조립주택 단지에서 지난봄부터 대책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 이장 이미상(65)씨는 “이번에 석리가 신규원전 부지로 되지 않으면 이젠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다”며 “먼저 원전부지로 정해졌다 해제되고 나서 마을 전체가 어둡고 침울하게 세월을 보냈는데, 작년에 산불까지 휩쓸고 가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이장은 영덕 바로 위 울진을 부럽게 얘기했다. “원래 영덕보다 인구도 적고 못살던 동네였는데, 원전이 들어서고 나서 위험하다는 말도 없고 사람 소리 나는 부자 동네가 됐다니까요.” 울진군에는 현재 한울 1~6호기와 신한울 1ㆍ2호기 등 8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신한울 3ㆍ4호기가 각각 2032년과 2033년 준공될 예정이다.
따개비마을에서 남쪽으로 10여㎞ 내려오니 영덕 읍내다. 동해선 철도가 지나가는 영덕역 인근 상가건물 4층에 자리한 ‘영덕 수소&원전 추진연합회’를 찾았다. 백지화됐던 천지원전 부지를 활용해 신규 원전을 유치하기 위해 2024년 만들어진 주민 중심의 민간단체다. 사무실 안팎으로 ‘영덕을 수소&원전의 허브로!!’와 같은 플래카드들이 붙어있고, 원전 유치와 지역경제 효과 정보를 담은 패널이 전시돼 있었다.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광성(66) 씨는 ”지역소멸과 지역경제 침체의 바닥에 이른 영덕군을 살릴 유일한 대안이 백지화됐던 신규 원전 재유치“라며 ”과거 천지원전 유치 당시 반대 의사를 보였던 군민 중 상당수도 이젠 원전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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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 정책 속 활력 잃은 마을
다른 목소리도 있다. 2019년 8월 당시 영덕핵발전소 찬반주민투표 추진위원회가 군민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신규 원전 유치 반대가 61.7%, 찬성 30.6%로 반대가 우세했다. 과거 천지원전 지정 당시 찬반주민투표 위원장을 지낸 백운해 영해침례교회 목사는 ”주민 여론은 원전 반대가 월등히 높았는데, 군 의회에서 전원 찬성으로 천지원전 유치 신청을 했다“며 ”원전 반대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광성 위원장은 ”당시 여론조사는 원전 유치를 원하는 군민들은 아예 참여하지 않은 잘못된 조사“라며 ”최근 여론조사는 아직 없지만, 원전을 유치해야 지역을 살릴 수 있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천지원전 건설이 애초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진작에 건설을 마치고 올해가 상업운전을 시작하는 해였다”며 “군민들이 넘쳐나던 읍내도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세월 속에 이젠 활력을 잃어버렸다”고 덧붙였다.
영덕은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2년 신규원전 부지로 지정됐으나,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원전 계획이 백지화된 이후 군 전체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한수원이 전쳬 예정부지 324만㎡(약 98만평)의 18.9%(61만㎡)까지 사들였다가, 매입을 중단했다. 이후 환매가 시작돼 세 집이 땅을 찾아갔으나, 탈원전을 반대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환매가 다시 중단됐다. 당시 군으로 내려온 380억원의 특별지원금은 쓸 틈새도 없이 이자까지 더해 국고로 회수됐다. 한때 12만명에 달했던 영덕군 인구는 현재 3만2000명. 군민의 73%가 사라져, 말 그대로 지역 소멸 수준이 됐다. 재정자립도는 7.72%로, 군 단위 기초지자체 중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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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은 주변 사람들이 제일 잘 알아"
영덕을 뒤로하고 동해고속도로와 국도를 타고 남쪽, 울주군으로 다시 달렸다. 읍내에서 떨어진 서생면 신암리. 새울원자력본부 바로 아래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와 한수원 인력개발원이 자리 잡은 곳이다. 한수원에 따르면 20만㎡(약 6만5000평) 규모의 이 부지가 신규 원전 2기가 들어설 규모가 된다. 캠퍼스에 들어서니 푸른 동해바다 해변을 끼고 5층 높이의 최신식 대학원대학교 건물이 등장했다. 바로 옆 학생 기숙사 건물은 휴양지 콘도 건물을 연상케 했다. 북쪽 철책 담장 너머로 새울원자력본부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근 카페에서 만난 손복락(63) 서생면 신규원전추진위원장은 “울주는 한수원이 가진 부지를 활용하면, 별도의 토지수용을 할 필요가 없고, 초고압 송전선로도 이미 있어, 신규 원전 건설 기간을 대폭 당길 수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원전은 원전 주변지역 사람들이 제일 잘 안다”며 “환경단체들이 원전의 방사성 물질 위험을 강조하는데, 6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온 나는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가 없다는 걸 직접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길영 울주군 의회 의장은 “과거 신고리 5ㆍ6호기(현 새울 3ㆍ4호기) 건설 중단 때 주민들 서명을 모아 다시 살렸을 정도로 울주군은 일부 환경단체를 제외하고는 원전 유치에 찬성하고 있다”며 “원전 건설 비용과 기간, 주민 수용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영덕은 울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신규 원전을 위한 부지선정위원회는 지난해 2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확정 이후 이미 구성됐다. 계획에 따르면, 신규 대형원전 2기(2.8 GW)가 2038년, 소형모듈원전(SMR) 1기(0.7 GW)가 2036년에 가동될 예정이다. 11차 계획 확정 이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1년이 또 그냥 지났다. 그 사이 안정적이면서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한 인공지능(AI) 시대가 불쑥 다가왔다. 미국ㆍ영국ㆍ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원전 되살리기 바람이 불고 있다. 원자력산업협회 관계자는 "AI 수요뿐 아니라 계획된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만도 막대한 전기에너지가 필요하다"며"올해 계획할 12차 전기본에 추가로 또 신규 원전이 포함되어도 중장기 국가 에너지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운게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