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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준강대국 대한민국의 선 곳과 갈 길

중앙일보

2026.01.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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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오늘의 한국은 국력과 문화, 기술과 물질에서 단연 세계적이다. 광복 100년의 성숙국가를 향한 간절한 염원(중앙시평. 2025년 8월 8일)에서 진단하였듯, 한국의 종합국력은 패권 국가 밑의 위치에까지 올라와 있다. 이후 발표된 국제적인 종합, 또는 상세 국력지표들은 한국의 위상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여러 인류문명의 영고성쇠 현장을 답사하면서 계속 만난 것 중의 하나는 한국상품과 문화였다. 최고의 보편종교를 창출한 국가의 한 외진 유적지에서는 소풍 나온 학생들로부터 BTS 기념품을 갖고 왔냐는 많은 요청에 크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국가와 장기간 유혈 충돌 중인 이웃지역의 한 청년은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의 전화와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한국, 준강대국 지위 부상
국력·상품·기술·문화의 절정
갈등·저출산·소멸 흐름도 최악
악성 국가정체 요인 치료 화급

세계 최고의 평화와 복지를 향유하는 나라의 유서 깊은 도시의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일군의 학생들이 한국음악을 틀어놓고 멋진 공연 연습을 펼치고 있었다. 그 젊은 학생들은 한국의 아티스트와 드라마에 대한 지식에서 필자를 압도하였다. 한 학생은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저축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인류문화유산 장소에서 만난 어린 학생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답사 중인 동료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조른다. 종종 들르는 유럽의 한 문학관에서 만난 독자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의 한 주제가 제주 4·3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여 한참을 설명하였다.

필자가 만난 이들은 종족과 언어, 종교와 문명, 시간과 장소가 크게 달랐다. 그만큼 한국문화에 대한 수용과 호응은 보편적·일반적이었다. 오래전 해외여행 시에 한국인들은 어쩌다 한국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뿌듯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한국산 자동차·전자제품·식품·이동전화를 세지 않는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허·반도체·조선·방산·해운을 포함한, 쉬이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못지않게 세계적이다.

수출·문화·상품·기술...의 넓이와 크기와 높이에 관한 한 한국은 제국 또는 준(準)제국 수준임을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종합국력을 기준으로 필자는 한국을 자주 준강대국으로 분류한 바 있다. 전통적 3분법, 즉 강대국·(중견국)중진국·약소국 분류에 따르면 준강대국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토·인구·경제·군사력을 포함해 기술·상품·매력·문화를 더할 때 준강대국은 당연히 가능하다. 제국 판별에 중요한(과거의 로마 가도나 실크로드처럼) 오늘의 기술 공급망과 해상 연결망까지 고려하면 한국의 준강대국 위상은 확고하다.

그리하여 이제 ‘한반도와 주변 4강’이라는 오랜 사유와 관념, 도식과 구도, 전망과 해법은 맞지 않는다. 한국의 준강대국 위상으로 인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 4강’에 둘러싸인 ‘약소국 한국’과, ‘외부에서 결정되는 한국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과 제국의 일반 속성은 준강대국 한국의 오늘을 두렵게 한다. 문명과 제국은 오랜 시간이 걸려 건설되나 급격히 쇠락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내부 요인으로 쇠락한다는 점도 같다. 즉 내부 요인으로 급격하게 조락한다. 문명과 제국의 이 순환법칙에서 예외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쇠락의 단초는 거의 모두 ‘절정에서의 갈등과 정체(停滯)’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같았다.

그 점에서 한국의 준강대국 지위와 한국문명의 절정은 자랑스러운 동시에 크게 두렵다. 이 위상까지 치고 올라온 방법과 요인들에 대한 긍지와 자부로 인해, 지금이 바로 정점의 정체일지 모른다는 반성과 진단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에서부터 급격히 침식해가는 쇠락요인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악 수준의 저출산과 자살 국가다. 게다가 발전은 오래 정체되어있고, 악성 진영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인구·지방·학교·아동) 소멸은 시대의 최중심어가 되었다.

진영갈등·저출산·자살·소멸·정체와 같은 만성적인 공적 문제, 즉 나라의 사활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너무 오래 방치되고 있다. 문명과 제국 멸망의 중심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정치는 나라를 사활지경에 몰아넣는 악성 공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또 특정 진영이 집권했다고 해서 개선된 적도 없다. 악성 제도와 악성 진영대결의 결합으로 인해 공적 문제는 계속 방치·악화되어왔을 뿐이다. 개혁은 진영에 유리한 부분에 집중된다. 특정 부문의 부분적 발전이 나라 전체의 정체와 소멸 흐름을 바꿔놓지 못한 핵심 이유다.

제도(헌정체제)와 사람(리더십)이 함께 전면 혁신되지 않는 한 부분의 성장·발전과 전체의 정체·쇠락이라는 기괴한 한국적 조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갈등과 정체로 인해 절정에서 쇠락으로 빠르게 돌진해간 인류 최고 제국의 중심과 끝단을 각각 반대 방향에서 두 번 밟아본 뒤의 깊은 두려움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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