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가 22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공식 출범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을 대신할 수 있는 기구로까지 언급해 온 구상이 국제 헌장 서명과 함께 실제 국제기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날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현장에선 미국 정부 주도로 평화위원회 헌장 서명식이 열렸다.
서명식은 이날 오전 11시10분쯤 열렸으며, 몽골·우즈베키스탄·아랍에미리트(UAE)·튀르키예·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파라과이·파키스탄·코소보·카자흐스탄·요르단·인도네시아·불가리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모로코·바레인 등 19개국 정상과 대표들이 무대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참석했다. 참석국 다수는 중동과 남미 국가들이었으며, 미국의 전통적 서유럽 동맹국 정상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CNN은 전했다.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평화위원회가 유엔을 대체하기보다는 “유엔과 함께(in conjunction) 협력해 일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유엔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지만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며 “위원회가 완전히 구성되면 유엔과 함께 매우 특별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취임 1주년 연설에서 “평화위원회가 유엔을 대체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유엔의 무능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화위원회가 가자지구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중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그는 가자 전쟁이 “사실상 끝나 가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는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행사에서는 가자 재건 구상도 공개됐다. 알리 샤트 가자행정국가위원회(NCAG) 위원장은 “다음 주 가자지구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국경검문소가 열릴 것”이라며 인도적 지원 확대를 예고했다.
평화위원회는 기본 회원국의 경우 무료로 3년 임기 가입이 가능하지만, 임기 제한이 없는 ‘영구 회원국’이 되려면 창설 첫해 10억 달러(약 1조4700억원) 이상을 기부해야 한다. 이 구조를 두고 국제사회에서는 ‘트럼프식 거래 외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평화위원회에 10억 달러를 보낼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고 타스·리아노보스티 통신이 이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궁에서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과 회담을 시작하며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새로운 평화기구에 러시아가 10억 달러를 할당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금이 미국의 제재로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활용해 마련될 수 있다며, 이미 미국 측과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전 백악관 고문과도 평화위원회와 우크라이나 평화 구상을 함께 논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될지는 불분명하며, 동결 해제를 위해 미국 측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현재까지 평화위원회 참여를 공식화한 국가는 약 20개국이다. 이스라엘은 참여 의사를 밝혔으나 다보스에 체류 중이던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은 서명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가자 전쟁을 둘러싼 외교적 긴장이 불참 배경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에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은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 역시 회의적이다. 이베트 쿠퍼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BBC에 “영국은 즉각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 초청과 조약상 의무를 우려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초청 사실은 인정했지만 참여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신중론 속에 내부 검토를 이어가고 있다. 이문배 외교부 부대변인은 22일 브리핑에서 “평화위원회의 평화·안정 기여 가능성과 우리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여권 고위 관계자도 “정부가 평화위원회 구상 자체를 환영하며 가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