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른여덟의 내가 잘 다니던 삼성전자로지텍에 사표를 던졌을 때 부장이 한 말이다. 흔히 퇴사에 용기가 필요하다지만, 난 회사를 더 다닐 용기가 없었다. 회사는 악몽 같았다.
왕복 4시간의 지옥철 출퇴근, 새벽별 보고 나가 밤별 보며 귀가하며 주말도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일했다. ‘까라면 까’ 식의 경직된 조직 문화 역시 내 자유로운 성정과 어울리지 않았다. 통장에 찍히는 월 300만원의 급여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뜬 얼굴이 더 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내 인생 2막은 이런 오기(傲氣)로 시작됐다. 이른바 ‘강남 8학군’에서 자라 미국 유학을 가 아칸소대 경영학 석사(MBA)까지 취득해 남 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나였다.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여기서 그만둔다고 내 삶이 무너질 리 없다. 내 앞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퇴사 후 나는 회사 코앞에 골목에 작은 술집을 차렸다. 테이블 6개가 전부인 8.7평짜리 공간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얼마나 가겠어?’라며 비아냥댔지만 난 보란 듯이 성공했다. 3년 만에 연 수익 1억원을 찍었다. 10년 정도 지나니 한 골목에 내 가게는 세 곳으로 늘었고, 내 별명은 ‘수원 백종원’이 됐다.
(계속)
하지만 인생은 만만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내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무리하게 확장했던 가게는 고스란히 빚더미가 되어 돌아왔다.
매달 1000만원씩 쌓이는 적자에 두 아들을 둔 아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낮에는 배달 라이더로,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했다. 그렇게 나는 공식적으로 ‘N잡러’가 됐다.
가장 처절했던 순간은 쿠팡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 아저씨! 이것도 안 보여요? "
나보다 스무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젊은 매니저의 날 선 목소리가 거친 기계음 사이를 뚫고 날아왔다.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속으로 수천 번은 더 외쳤다.
‘야, 인마! 왕년에 내가 삼성에서 이런 물류센터 하나를 통째로 설계하고 날리고 하던 사람이야!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놈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 말은 쓰디쓴 침과 함께 삼켜야 했다. 20여 년 전, 내가 당차게 떠난 그 회사는 지금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 무시 당하며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비참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힘든 노동을 버티려면 내 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
‘삼성맨’도 성에 안 차 과감하게 사표를 썼던 미국 석사 출신 김도현(58)은 결국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났다. 매달 땀에 젖은
돈 500만원을 벌어오는 가장으로 당당히 서 있다.
20년여간 취업·창업·프리랜서까지 전업에 전업을 거듭하며 인생 2막·3막을 열어낸 ‘절대 망하지 않는 생존 기술’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