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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500 버는 비법 찾았다" 추락한 前삼성맨의 생존 기술

중앙일보

2026.01.22 12:00 2026.01.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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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참 용기가 대단하구나. "
2006년, 서른여덟의 내가 잘 다니던 삼성전자로지텍에 사표를 던졌을 때 부장이 한 말이다. 흔히 퇴사에 용기가 필요하다지만, 난 회사를 더 다닐 용기가 없었다. 회사는 악몽 같았다.

왕복 4시간의 지옥철 출퇴근, 새벽별 보고 나가 밤별 보며 귀가하며 주말도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일했다. ‘까라면 까’ 식의 경직된 조직 문화 역시 내 자유로운 성정과 어울리지 않았다. 통장에 찍히는 월 300만원의 급여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뜬 얼굴이 더 보고 싶었다.
 2001년 김도현씨(맨 오른쪽)의 미 아칸소대 경영학 석사 학위 졸업식 날. 사진 김도현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내 인생 2막은 이런 오기(傲氣)로 시작됐다. 이른바 ‘강남 8학군’에서 자라 미국 유학을 가 아칸소대 경영학 석사(MBA)까지 취득해 남 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나였다.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여기서 그만둔다고 내 삶이 무너질 리 없다. 내 앞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퇴사 후 나는 회사 코앞에 골목에 작은 술집을 차렸다. 테이블 6개가 전부인 8.7평짜리 공간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얼마나 가겠어?’라며 비아냥댔지만 난 보란 듯이 성공했다. 3년 만에 연 수익 1억원을 찍었다. 10년 정도 지나니 한 골목에 내 가게는 세 곳으로 늘었고, 내 별명은 ‘수원 백종원’이 됐다.
(계속)
김도현씨가 일본 유명 꼬치 집에서 레시피를 전수받고 있다. 사진 김도현
하지만 인생은 만만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내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무리하게 확장했던 가게는 고스란히 빚더미가 되어 돌아왔다.

매달 1000만원씩 쌓이는 적자에 두 아들을 둔 아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낮에는 배달 라이더로,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했다. 그렇게 나는 공식적으로 ‘N잡러’가 됐다.

가장 처절했던 순간은 쿠팡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 아저씨! 이것도 안 보여요? "
나보다 스무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젊은 매니저의 날 선 목소리가 거친 기계음 사이를 뚫고 날아왔다.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속으로 수천 번은 더 외쳤다.
‘야, 인마! 왕년에 내가 삼성에서 이런 물류센터 하나를 통째로 설계하고 날리고 하던 사람이야!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놈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 말은 쓰디쓴 침과 함께 삼켜야 했다. 20여 년 전, 내가 당차게 떠난 그 회사는 지금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 무시 당하며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비참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힘든 노동을 버티려면 내 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
 김도현씨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당연히 '노(NO)'라고 하겠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삼성맨’도 성에 안 차 과감하게 사표를 썼던 미국 석사 출신 김도현(58)은 결국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났다. 매달 땀에 젖은 돈 500만원을 벌어오는 가장으로 당당히 서 있다. 20년여간 취업·창업·프리랜서까지 전업에 전업을 거듭하며 인생 2막·3막을 열어낸 ‘절대 망하지 않는 생존 기술’은 무엇일까.

N잡러가 꼽은 ‘최고의 부업’과 미국 석사 출신, 삼성맨 등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하고 바닥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었던 그의 비전은 무엇일지 아래 링크에서 공개합니다.
“배달·대리·탁송 중 이게 최고” 월 500 버는 前삼성맨의 부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96646




김서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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